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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1부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는 영국과 프로이센 동맹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맺는다. 두 나라는 사돈을 맺기로 하고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 혼인을 결정한다. 루이가 16살이였고 앙투아네트가 15살이였다. 원래는 언니가 혼인 상대 였으나 언니가 몸이 아파 동생인 앙투아네트가 대신 시집을 간 것이였다. 앙투아네트 엄마는 마리아 테레지아로 탁월한 정치력과 외교력의 합스부르크가에 유일한 여왕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시집 오기전 프랑스 국경 도시인 스트라스부스에서 이름을 바꾸고 옷도 갈아입고 하인과 반려견도 오스트리아로 돌려보낸다. 완전히 프랑스 사람이 되는 것이였다. 원래 이름은 마리아 안토니아 였는데 여기서 개명하여 마리 앙투아네트가 된다. 시작부터 조짐이 좋.. 2024. 4. 21.
앤티텀 전투 북군은 버지니아군 사령관에 존 포프를 앉힌다. 남아있는 북군을 모아 북쪽에 진을 치게 된다. 맥클레런을 로버트 리가 몰아내긴 했으나 북쪽과 남쪽으로 북군이 남아있는 위험한 상태였다. 로버트 리는 활로를 뚫어야 했다. 맥클레런 성향을 파악한 로버트 리는 남쪽의 맥클레런은 움직이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북쪽으로 활로를 뚫기로 한다. 혹시 포프와 맥클레런이 합류하여 리치먼드로 향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각개격파하기로 하고 포프로 병력을 집중시킨다. 1862년 8월 20일부터 30일 까지 제2차 불런(매너서스) 전투가 벌어진다. 여기서 북군이 패하게 된다. 로버트 리는 이 기회에 워싱턴 D.C. 병참선을 치기로 한다. 방어력이 강한 수도보다 뒷 배후를 침으로써 북군에 압박을 가하고 리치먼드에 있는 북군을 약화시키기.. 2024. 4. 19.
진시황제 2부 통일되지 전에 했던 초심을 잃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진시황제는 연이은 실정을 거듭하게 된다.북쪽 흉노족을 막는다며 만리장성을 축조한다. 흉노족은 진이 중국을 통일하기 전에도 문제를 많이 일으킨 종족이였다. 그래서 이 전부터 이들을 막기위한 성벽이 있었다. 진시황제는 이들 성을 하나로 묶는 대공사를 시작한 것이다.비바람이 치고 눈이 와도 공사는 계속되었다. 무려 30만명이 동원된다.산에다가 성을 쌓으니 산에서 비박하고 식사도 부실했다. 백성의 원성이 자자해진다. 성 축조에 돈도 많이 들어 세금도 마구 거두어들인다.진시황제는 한발 더 나아간다. 자신만의 사상이 옳다며 다른 사상과 진나라 기록이 아닌 것은 모두 불태운다. 이걸 분서라 한다. 혹시 백성들이 책을 읽고 반기를 들까봐 두려워한 것이였다.두 사람 이.. 2024. 4. 18.
진시황제 1부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시황제의 기록은 사마천이 쓴 [사기]라는 책의 내용을 근거한 것이다.기원전 250년경 중국은 7개의 나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들 나라 중 진나라는 서쪽 변방에 있었고 이 지역은 실크로드 교역로 중심에 있어서 매우 개방적인 나라였고 여러 나라의 인재를 가리지 않고 받는 등 번성한 나라였다.7개의 나라가 서로 힘의 균형을 이루고 치고 박고 싸우는 형국이 계속되었다. 이들 나라중 진나라에서 진시황제 아버지가 자초가 있었다. 자초는 왕위 계승 순위가 낮았고 조나라로 인질로 보내진다. 그러던 중 거상 여불위를 만난다. 여불위는 여러 나라를 돌며 장사를 해서 막대한 부를 축척한 인물이였다. 물건 보는 안목뿐만 아니라 사람보는 눈도 뛰어났다. 자초를 본 여불위는 이거 투자해 볼만하다며 자초와 친.. 2024. 4. 18.
북부 채권 판매 지폐 발행에 비해 채권 발행이 비교적 안정적인 자금 조달 방법이다. 전쟁이 나면 인플레가 나기 마련인데 여기에 돈까지 풀면 경제를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문제는 채권을 누군가는 사주어야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북부는 남부 탈퇴로 면화 수출도 막히자 채권 팔기는 더 어려워 진다. 유럽 입장에서는 면화를 수출하는 남부 채권이 오히려 더 매력적일 수 있었다. 또한 전쟁 승패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판에 채권 사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채권을 살 경우는 남부와 북부 모두 사서 위험을 회피했다.이런 판국에 유대계 금융 재벌 출신인 로스차일드 가문의 미국 대리인 어거스트 벨몬트가 나선다. 벨몬트는 열성 민주당원인 동시에 연방 주의자였다. 그는 연방을 돕는다며 북부 채권을 직접 구입한다. 유럽에서 자신의 인맥을 동원 .. 2024. 4. 18.
남부 그레이백 남부도 북부와 마찬가지로 지폐를 만든다. 안타깝게도 남부는 북부에 비해 공업이 덜 발달되었다. 그레이백으로 불리는 흑백으로 인쇄된 지폐를 만들게 된다. 위조지폐가 성행하자 도안을 계속 바꾸어 가며 지폐를 발행한다. 엉망진창이였다. 세금도 나중에는 현물로 요구하는 지경에 이른다. 희한한 사건도 발생한다. 새뮤얼 업햄이라는 필라델피아에서 잡화점을 운영하는 자영업자가 있었다. 어느날 그는 신문에 실린 그레이백 발행 소식을 보게 된다. 그는 신문사로 달려가 5달러 이미지를 인쇄한 원판을 구하게 된다. 문제는 이 원판이 실제 지폐 크기와 똑같았던 것이였다. 이걸 딱 본 업햄은 사업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구입한 원판으로 지폐를 인쇄하여 기념품으로 판매한 것이다. 위조지폐가 아니고 기념품이라는 문구를 밑에 넣는다. .. 2024. 4. 17.
북부 그린백 남북전쟁 직전에 미연방정부는 국가 부채가 많았다. 제임스 뷰캐넌 시절 절정에 달해 다음 대통령 링컨이 정권을 잡고보니 부채는 3배 가량 늘어나 있었다. 남북전쟁을 치루어야하는 북부로서는 돈을 어디서 구해야 했다. 방법은 두가지 였다. 세금을 걷거나 채권을 판매하는 것이였다. 의회는 채권을 승인하면서 소득세 부과를 승인한다. 오늘날 소득세 부과는 자연스러운 것이나 그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자본주의 핵심이 사유재산인정이므로 소득세는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영국은 나폴레옹과 전쟁을 치르면서 전비 마련을 위해 일시적으로 소득세를 부과한 적이 있었다. 당시 연방정부 세금은 각종 인허가세와 관세였다. 하지만 주요 수출품인 면화에 대한 관세와 남부가 수입하는 공산품에 세금을 메길 수 없는 상황이 오자 소득세를 부.. 2024. 4. 17.
현존하는 기업들 남북전쟁 속에서도 이 특수를 이용해 돈을 벌고 오늘날 까지 살아남은 기업들이 있었다. 아메리카 익스프레스는 남북전쟁 당시에 우편서비스를 담당했다. 미국은 땅덩이가 넓어서 지역마다 우편물 배달 업체가 성행했다. 아메리카 익스프레스는 여러 주에 900개 사무소를 운영하면서 우편을을 취급했다. 주기적으로 선거할 때 전방 군인들의 부재자 투표함을 날랐고 전사자들의 시신도 운구해 주면서 떼돈을 번다. 이것이 기반되어 오늘날 미국인 지갑 속 필수품인 신용카드 회사로 거듭나게 된다. 의류 브랜드 Brooks Brothers 는 기성복 사업을 하고 있었다. 링컨이 재선을 성공하고 취임식 당일 입었던 코트를 특별히 제작하기도 한다. 남북전쟁 시에는 군복을 대량 생산해 떼돈을 번다. 이 회사는 불량 군복 납품 비리도 저질.. 2024. 4. 17.
스톤월과 스튜어트의 활약 남부 수도가 떨어질 위기에 처하는데 이 때 남부의 구세주가 나타난다. 바로 스톤월 잭슨이다. 스톤월 Stone Wall로 돌담벼락이란 뜻이다. 원래 이름은 토머스 조너던 잭슨이다. 얼마나 잘 싸우는지 돌벽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스톤월은 남부 셰넌도어계곡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그는 버지니아 군사학교를 졸업한 포병교관 출신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 미육군참모총장인 조지 마셜도 이 학교 출신이다.스톤월은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미연방군 무기고를 털어 휘하 여단과 민병대를 무장시키고 훈련시킨다. 1차 불런전투(매너서스전투) 에서 여단이 사단급으로 확장된다. 이 지역은 남부의 곡창지대일 뿐아니라 북부의 수도 워싱턴 D.C를 공격할 수 있는 주요 루트도 될 수 있는 곳이였다. 셰넌도어 계곡의 중요성을 안 북부는 이.. 2024. 4. 17.
리치먼드로 좀 빨리 가라 링컨이 빨리 좀 남부 수도 리치먼드로 진격하라고 맥클레런을 압박하지만 맥클레런은 너무 신중했다. 남군을 정찰하게 되고 남군이 북군을 속이기 위해 통나무를 대포인 척하고 기만작전을 펼친 것을 알게 된다. 존스턴군은 북군의 병력이 남군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눈치 까고 병력을 뒤로 뺀 것이다. 여론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 뭐하냐는 비난이 쏟아지게 된다. 맥클레런은 이 전쟁은 몇 년은 걸릴 것이라고 응수한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여론은 그를 굼벵이 맥이라며 다시 비난한다. 여론은 남부 스파이가 아니냐며 나중에 남부 영웅이 되어 대권을 넘보는 것이냐는 원색적인 비난도 가한다. 성화에 못 이긴 맥클레런은 수도에 45000여명의 방어 병력을 남기고 1862년 3월 1일 포토맥군 10만을 출항시킨다. 4월 2.. 2024.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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