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코프는 공세적으로 나가며 일본군을 자극하게 된다.관동군 참모 츠지 마사노부가 이건 참을 수 없다며 나서게 된다.이 양반은 나중에 태평양 전쟁 때 과달카날 전역에 나서서 미군의 매운 맛을 보게 되는 장교이다.일본은 사단 번호가 낮을 수록 전통있고 강한 부대인데 여기에 7사단 병력을 증파하게 된다.공격을 할 때 국경을 넘는 것이기 때문에 일본 참모부에 보고를 하게 된다.일본군 지휘부는 뭔가 말끝을 흐리게 된다.마사노부는 이건 암묵적 용인이라며 국경을 넘어 공격을 개시한다.전차 73대와 장갑차 19대 병력 2만명을 투입한다.









주코프 역시 여기에 막강한 전력을 배치하고 있었다.소련은 중포를 대거 배치하고 있었다.일본이 가지고 있는 포들보다 구경이 컸다.포병으로 쏘아대고 전차들도 동원 일본군을 두들기게 된다.1939년 7월 4일~5일 정도 한 5일 정도 공격한 후에 일본은 소련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다시 적 우측을 공격했으나 소련의 방어망은 견고했다.양측 사상자는 5000여명 이상으로 작은 국경 분쟁 정도가 아니라 정규전 이상 규모로 확전되고 있었다.


일본군은 치열한 전투 중에 무시무시한 결정을 내린다.전차를 아껴야 한다며 뒤로 후퇴시키고 보병만 남긴 것이다.보병들은 전차를 상대하기 위해 장대에 폭약 뭉치를 달고 전차에 던지는 방식으로 싸우게 된다.이게 건빵 폭탄이라 불리는 무기다.일본군 보병이 사무라이 정신으로 이렇게 달려들어 소련군 피해도 상당했다.






주코프는 반격작전을 준비하게 된다.본국에서 병력이 막 들어오고 전투기 ,전차,중포 이런 무기들이 계속 공급된다.일본군도 만만치 않은 전력이였으나 어느 순간부터 소련 장비가 수적인 면에서 앞서게 된다.군수 능력도 엄청났다.일본군은 소련군의 보급 능력을 얕잡아 보고 있었다.거점에서 할하강유역까지 오려면 길이도 길지만 초원이라서 오기가 정말 힘든 길이였다.이걸 극복하고 어마어마한 군수 물자를 나르게 된다.기만 작전도 펼친다.군수 물자를 밤에만 움직였다.마치 후퇴하는 듯한 모습도 보여준다.공세계획도 사전에 철저히 비밀로 붙이면서 당일 전날에 알려준다.소련군은 어느 순간 부터는 무선통신을 끊고 삽질만 하는 모습만 보여주게 된다.일본군은 소련군이 철수하고 있고 방어 준비를 한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소련은 대공세를 하게 된다.일본은 사전에 소련군이 집결함을 봄에도 희망회로를 돌린다.이같은 보고를 자기 좋은 대로 해석하고 있었다.1939년 8월 20일 소련군 포병과 항공기는 일제히 일본군을 향해 공격을 시작하게 된다.포격으로 지휘부가 마비 소련군은 양익포위에 들어간다.모든 병종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일본군은 무너지게 된다.이전까지 소련군의 능력은 좋지 않았다.앞서 있었던 6,7월 전투에는 일본군이 소련군을 가지고 놀다 시피했는데 주코프는 이를 유기적 군 운용으로 극복하게 된다.









일본군 전차와 소련 전차는 간극이 컸다.일본군 전차는 뻥뻥 뚫린 자국이 많았고 소련군 전차는 불탄 흔적이 많았다.소련군 전차가 포로 일본군 전차를 쏘면 그대로 관통하면서 파괴했으나 일본군은 전차를 보병이 화염병 던지며 격파한 것이다.일본군 보병의 활약은 눈물 겨울 정도였다.차량 탑승은 꿈도 못꿨다.그나마 있는 전차도 연료 보급에 허덕였다.소련군은 일본군의 전차를 막기위해 피아노줄도 활용한다.독일 전차들은 이걸 깔아 뭉개고 지나가나 일본 전차는 걸려서 움직이지 못했다.이게 막 엉키면서 전차 열기와 만나서 그대로 녹아 거기서 옴싹달싹 못한 것이다.일본 보병은 대전차 총검술이라는 무지막지한 전술로 소련 전차를 상대하고 있었다.소련군 입장에서는 두려웠다.소련 장교들 중 일부는 일본군이 이리 극렬히 저항하는데 무리하는 것 아니냐며 멈추자 하지만 주코프는 여기서 멈추면 나중에 10배 100배 적을 제압하기 힘들다며 그대로 공격을 하라 명하게 된다.






1939년 8월 24일 관동군은 다시 소련군을 향해 덤벼들게 된다.소련은 포병과 항공력을 적절히 동원하며 이를 막게 된다.일본군은 조금씩 갈려나가게 된다.일본군은 대전차 지뢰를 깔며 저항했지만 무용지물이였다.모래에 묻혀 이게 재대로 동작을 안한 것이다.일본군은 몸빵으로 적 전차에 덤벼들고 소련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다.일본군은 17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사망자는 8000여명이 발생한다.소련 역시 사망자가 9000여명이였다.포위섬멸전을 한 거는 소련군인데 피해는 소련이 더 많이 본다.대대전체가 소련군 전차를 막는다며 전원 사망한 예도 있었다.전투에서 일본은 졌지만 이런 식의 저항으로 소련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준 것에 대해 고무된다.이 자체가 일본군 지휘부가 죽기 살기로 덤비면 된다는 잘못된 시그날로 전해지게 된다.








몽골에서도 할하강 전투가 의미가 깊다.학술대회가 열릴 정도로 아직도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소련군과 일본군의 싸움이였지만 여기에 투입된 몽골군도 적은 수가 아니였다.소련은 할하 부족을 일본은 바르가 부족을 동원하게 된다.이들 모두가 몽골인이였다.상대 부족끼리 동족상잔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소련 밑에 할하 부족이 승리하면서 몽골 권력자 처이발상은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게 된다.





아직 연구 중이지만 일본군이 몽골군을 상대로 세균전을 감행했다는 연구도 존재한다.물론 일본군의 할하강에서 세균전을 했다는 공식 기록은 없다.하지만 정황상 가능성은 존재한다.1932년 이시이 시로는 방역 연구소를 설립한다.그 방역실이 만주국 허얼삔으로 이전하여 가모부대가 됬다가 1936년 관동군 방역부로 확장 된다.여기 부대장으로 이시이 시로가 임명된다.1938년~39년 이시이 시로는 세균전이 얼마나 유용한가를 증명해야 했다.군부에서는 세균전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많았다.어필을 해야 예산을 따오고 실험도 할 수 있었다.이 시기가 하필이면 할하강 국경 분쟁 시기와 겹치게 된다.이 시기에 부대에 여러 지부가 갑자기 늘어나게 된다.결국 1941년 8월 관동군 방역 급수부로 조직이 커지고 이 부대가 우리가 아는 731 부대이다.
'역전다방 > 독소전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스탈린의 오판 (0) | 2026.02.22 |
|---|---|
| 주코프 성장과 관동군 (0) | 2026.02.21 |
| 소련 57군단장 주코프 (0) | 2026.02.18 |
| 장고봉 전투 (1) | 2026.02.18 |
| 크레타섬 공수 작전 (0) | 2026.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