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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다방/독소전쟁

게르니카 폭격

by senamu 2026.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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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에 있는 프랑코는 본토로 들어가야 했지만 재해권은 공화군이 쥐고 있었다.건너갈 수단이 없었다.1936년 7월 17일 도움의 손길이 오게 된다.히틀러가 수송기인 융커스52를 지원해주기로 결정한다.히틀러는 스페인에도 파시즘을 전파시킬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음악도 한몫한다.지원 결정하기 전에 히틀러는 바그너의 오페라 발퀴레를 관람하게 된다.이 관람중에 프랑코의 거병소식을 듣게 된다.바그너 음악에 감동받은 히틀러는 프랑코가 좌파 사회주의에 맞써서 거병했다며 바그너 음악에서 딴 작전명 불마법 작전을 승인하고 수송기를 국민군에게 지원하게 된다.무솔리니 역시 국민군을 지원하겠다고 나선다.스페인 내전을 통해 주축국은 연합전선을 다지게 된다.8~9월 사이 12000여명의 국민군이 수송기를 타고 본토에 진입하게 된다.

공화군은 영국과 프랑스에 sos 를 치나 영국과 프랑스는 너희 집안 일이니 무간섭원칙을 정하게 된다.이 원칙을 국제사회를 통해 합의까지 한다.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이 원칙에 동의하는 척 하면서 군대 마크를 지워 마치 민간인이 지원하는 것처럼 위장한다.공화군의 동아줄이 날아가자 공화군은 소련에게 매달리게 된다.스탈린은 개입을 결정한다.2000여명의 군사고문단과 무기를 지원하게 된다.소련은 적극적 지원보다 버틸 수 있는 최소한만 지원하게 된다.그러면서 스페인의 금을 요구한다.스페인은 잉카제국 정복당시 금을 긁어 모으기 시작하여 금 보유고가 세계4위였다.거의 금이 700톤이였는데 안전한 소련 품에 맡기라면서 그 중 500여톤을 가져간다.

모로코에서 건너온 국민군은 마드리드로 직행하면 좋겠지만 톨레도를 거치기로 한다.톨레도의 알카사르 요새에서 국민군이 갇혀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공화군이 이들을 함락시키려 들지만 요새에 들어간 국민군은 끝까지 저항하며 버티고 있었다.프랑코는 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프랑코는 자기가 정당성있는 인물임을 보여줄 필요가 있던 것이다.톨레도에서 이들을 구원한다면 자신의 정당성에 큰 의미가 부여될 수 있었다.이 결정으로 마드리드 공략은 지체되게 된다.

톨레도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마드리드는 방어력이 업되게 된다.세계 여러나라에서 의용군이 스페인으로 공화군을 돕겠다며 집결하고 있었다.병력은 4만정도였지만 무시할 수 없는 규모였다.이들은 프랑스에 모여서 스페인으로 들어가는데 프랑스 정부는 의용군 앞길을 막지않고 터주게 된다.이들이 나서자 독일과 이탈리아측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의용군이 국민군편에 서게 되고 스페인 내전은 국제전이 되게 된다.스페인 식민지였던 멕시코도 참전한다.멕시코도 좌파 민족주의 성향이였다.공화군에 동질감을 느끼고 이들을 지원하게 된다.소총 2만정과 2천발의 탄약을 지원해 준다.공화군은 아무래도 바다를 건너오고 있어서 한꺼번에 집결할 수 없었고 비행기로 오다보니 중화기를 들여올 수가 없었다.이 때 공화군에게 소련제 탱크까지 들어오게 된다.

불리한 상황속에 국민군은 마드리드를 포위하는데 성공한다.위기감을 감지한 11월이 되자 공화군 정부가 도망쳐 버린다.무정부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쥐고 마드리드를 끝까지 사수하자며 사람들을 독려하게 된다.시민들은 두려움 느끼기 보다는 결사항전으로 기울어 지게 된다.국민군은 마드리드를 밀지 못하고 고전하게 된다.중화기가 없으니 강펀치로 상대를 칠 수 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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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가 이지경에 이르자 히틀러는 초조해진다.독일은 스페인에게 강력한 펀치를 줘야 겠다며 공군 투입을 결정하게 된다.콘도르군단을 보내게 된다.공군병과는 다 붙여서 완전한 편제가 갖추어진 항공군단을 지원하게 된다.괴링은 독일 공군을 실전 시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게 된다.복엽기 하인겔 51이 투입되는데 상대는 소련의 I-15,16이였다.독일 공군도 별 실전 경험이 없었다.여기서 무참히 깨지게 된다.마드리드를 단기간에 깨지 못하자 전략을 바꾸게 된다.장기전에 필요한 물자를 얻어야 겠다며 공업지대인 바스크 지역 공략으로 진군하기로 결정한다.여기는 분리주의자들이 있는 곳인데 국민군의 사상은 분리주의를 허용안하고 오히려 공화군쪽에서 우리 도와주면 떡고물 떼줄께 이러고 있는 상황이였다.

겨울이 지나고 1937년 4월 국민군은 게르니카를 폭격하게 된다.이 폭격에 독일 폭격기 융커스 52가 동원된다.폭격기에 대형 고폭탄,소형 고폭탄,소이탄을 섞어서 전술적 실험을 하게 된다.원래 주요 교통로인 다리만 끊으려 했지만 당시 기술이 그럴 수가 없었다.도시 전체가 폭격을 받게 된다.하필이면 이 날 장이 서는 날이라서 사람들이 몰려있었다.1파가 먼저 폭격하고 그 뒤로 2파가 와서 폭격을 가하게 된다.1500여명의 게르니카 시민이 죽게 된다.세계 언론에는 이게 부풀려져서 3천에서 4천이 사망한 것으로 타전되게 된다.

피카소는 이 참상을 듣고 분개한다.피카소는 게르니카라는 그림을 그려 이 참상을 남기게 된다.피카소의 정치적 성향은 공산주의에 가까웠다.즉 공화군 지지자였다.공화군은 폭격으로 죽은 어린 아이 사진을 퍼뜨리며 국민군의 잔인성을 알리게 된다.놀라운거는 이 게르니카 폭격에 대해 후대에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나중에 스페인 국민군이 승리 프랑코가 장기 집권하게 된다.프랑코 사 후 10년 후 스페인이 민주화되는데 이 과정에서 좌파 우파가 우리 과거는 잊고 새 시대를 만들기로 합의한다.그러면서 망각협정을 체결 모든 것을 잊자하게 되고 게르니카의 비극도 잊혀지게 된다.그 후 한참 지나서 게르니카 폭격이 재조명된다.다시 조사해 보니 게르니카 사망자수는 애초보다 적은 300여명 수준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된다.

게르니카가 깨지자 다음은 빌바오였다.바스크 민족주의자들은 피해를 막고자 국민군과 협상을 시도한다.바티칸 교황청에 도움을 요청하며 협상을 하려 했으나 실패한다.빌바오 시민들은 짐을 싸고 도주한다.빌바오 주민이 빠지자 그 자리는 군대만 남게 된다.시가전을 펼치려면 시민의 협조도 있어야 하는데 이걸 기대할 수 없게 된다.빌바오는 함락되고 그 옆에 도시도 차례대로 무너지게 된다.3월에 시작된 공세는 10월에 마무리되고 국민군은 바스크 지역을 손에 넣게 된다.독일은 재빨리 이 곳 공장 지역을 접수해 버리고 독일인 기술자를 파견 직접 공장을 운영하게 된다.폭격의 대가를 가져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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