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전쟁 초기 한국은 1800여명의 병력과 경항공기 22대정도를 보유하고 있었다.이걸로는 뭘 할 수 있는게 없었다.1950년 7월 F-51D 머스탱을 인수받어 본격적인 공군이 만들어지게 된다.하지만 이를 조종할 수 있는 조종사는 턱없이 부족했다.조종사 양성을 위해 부대를 제주도로 옮기게 된다.조종사를 양성하기 위해 미군은 별도 군사고문단을 만들어 이들을 지원하게 된다.







미군 딘 헨스 소령의 업적이 빛나게 된다.머스탱기 18번기를 몰았고 이 비행기는 신념의 조인(I fly by faith)로 불리게 된다.비행기는 편대 단위로 움직이는데 여기서 편대장의 역할은 조종사 기량 향상에 매우 중요했다.이 일을 잘 한 사람이 딘 헨스 소령이였다.거듭되는 훈련으로 한국군 조종사들의 실력은 비약적으로 향상되게 된다.










한국군은 축적된 조종사로 이제 독자 노선을 꿈꾸게 된다.전방에 분산된 공군 기지를 사천에 집중시키게 된다.편대장까지 배출되면서 독자적 작전 수행을 갖추게 된다.남쪽에 남아있던 북한군과 중국군 토벌 작전에 투입되게 된다.하지만 여기서는 북쪽으로 넘어가 폭격을 할 수 없었다.1951년 9월 한국 공군은 강릉에 기지를 만들게 된다.여기서 국군 1군단 작전을 돕게 된다.거의 645회 정도의 소티(출격 횟수)를 기록하게 된다.한국군은 작전 성과에 만족하며 강릉에 머스탱기를 20대로 늘리게 된다.정전 무렵에 강릉에는 F-51D가 80여대로 대폭 늘어나게 된다.







1952년 휴전 협상이 난항에 빠지자 유엔군은 공군을 이용 대거 북폭에 들어간다.미 5공군은 승호리 철교를 폭격해 다리를 끊어 버린다.하지만 북한은 다시 임시 다리를 세우게 된다.그리고 대공포도 배치하며 방비 강화에 나서게 된다.하도 두들겨 맞으니까 이제는 아얘 설계도 바꾼다.복구가 쉬운 방식으로 만든 것이다.부수면 또 세우고 부수면 또 세우고 이런 일이 반복된다.이제 대공망도 강화되고 미 5공군은 여기를 포기하게 된다.









미 5공군이 실패하자 이 임무는 한국 공군에게 떨어진다. 1952년 1월 12일 오전 7시40분 F-51D 머스탱 6기가 승호리 철교를 끊기 위해 출격한다.폭탄을 투하했지만 모두 빗나가면서 임무에 실패하게 된다.이날 오후 2시에 2차 출격을 감행하게 된다.윤응렬 대위와 옥만호 대위가 나서게 된다.이번에는 폭탄과 로켓탄등 가용한 무기는 다 동원했으나 실패하게 된다.













한국 공군은 장교단 회의를 소집하고 문제가 뭔지를 분석하게 된다.미 공군 교리에 따라 하다 보니 폭격 고도가 높았는데 이거를 대폭 낮추기로 한다.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슈투카는 지상 목표물 타격 성공률이 80%였다.말 그대로 급강하에서 목표물에 근접해서 폭탄을 떨어뜨리니 명중률이 높은 것이다.급강하 폭격기는 잘못 폭탄을 떨어뜨리면 이 폭탄이 지상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류에 의해 자기 자신한테 부딪힐 수 가 있었다.이걸 막기 위해 다이브 브레이크하고 폭탄을 자연스럽게 투하하는 장치가 있었는데 머스탱은 이게 없었다.그대로 저고도로 수평비행을 해서 폭탄을 떨어뜨려야 했다.이렇게 비행하면 적 대공포에 표적이 되어 매우 위험했다.1월15일 다시 폭격에 나서게 된다.윤응렬 대위와 옥만호 대위가 다시 출격한다.2편대가 엄호하고 1편대가 폭탄 투하 임무를 맞게 된다.이 공격으로 승호리 철교에 구멍이 난다.이 후 1시에 이기협 대위 편대가 출격 다리를 박살내고 무사 귀환하게 된다.




미군은 한국 공군의 성과에 놀라게 된다.이게 되게 어려운 임무였다는 것은 미군도 알고 있었다.이 후 미군은 한국 공군 성장에 더더욱 힘을 쏟게 된다.한국 공군은 고속성장하며 독자 능력을 갖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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