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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다방/6.25 전쟁

백마고지

by senamu 2025.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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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군은 철원평야로 공격하려 들게 된다.여기는 중요했다.여기를 먹으면 미군의 기갑부대가 쭉 밀고 들어올라가는 길목이였다.그럴려면 양쪽 옆에 펼쳐진 고지를 먹어야 했다.미군이 보기에 산들이 있는데 이게 확 와닿지 않게 된다.항공사진으로 촬영을 하면서 보이는 모양대로 이름을 짓게 된다.미군은 중국군이 다음 공세에는 백마고지로 올 것을 예상하고 방비를 강화하게 된다.

여기에 상대는 중국군 38군이였다.14시간동안 70여 km 산악행군을 감행 미9군단 퇴로를 막은 그 부대였다.펑더화이가 만세군이라 불렸던 부대였다.이 부대에 막강한 화력까지 몰아주고 철원 지대에 배치하게 된다.이에 맞써는 부대는 한국군 9사단이였다.9사단은 충정도 사람기반인 부대였다.창설직후 남쪽에서 공비를 토벌하다가 현리 전투에 투입 쓰라인 패전을 겪게 된다.9사단은 절치부심하며 체계적 훈련을 받게 된다.미군의 도움아래 FTC 훈련을 진행해 실전 감각을 익히게 된다.사단장도 바뀐다.박병권은 미육군 지휘참모대학으로 가게 되고 그 뒤를 김종오 사단장이 맡게 된다.9사단은 미 9군단으로 배치되고 자체적으로 훈련을 거듭하며 연계작전 능력도 배가시키게 된다.

한국군 9사단은 백마고지로 배치되고 계속된 진지 공사를 통해 방어력을 향상시키게 된다.병력도 차근차근히 쌓게 된다.미군은 화력도 9사단에게 많이 지원해 주게 된다.9사단에 전차도 배속되며 화력은 배가된다.이렇게 미군이 여기에 몰빵한 것은 정치적 이유가 깔려 있었다.트루먼 정부는 한국군 증강에 부정적 입장이였다.유일한 지지자는 밴플리트 뿐이였다.백마고지 전투에서 만일 한국군이 이긴다면 더 많은 지원을 얻어낼 수 가 있었던 것이다.중국군은 포는 많았지만 포들이 통일이 안되어 있었다.한국군은 포병 훈련을 엄청 빡세게 시키고 포진지도 강화한다.

한국군과 미군은 포병 좌표도 전부 다 따놓게 된다.능선상에 FDC 를 배치 적을 관측하고 관측 결과에 따라 포를 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된다.장애물도 산더미처럼 배치한다.지뢰를 무지막지하게 배치하고 조명지뢰와 탐조등까지 준비한다.중국군의 야습에 대비해 밤을 낮처럼 싸우겠다는 의지였다.중국군은 영양이 부실해서 비타민 A 결핍이 많았다.탐조등이 밤에 탁켜지면 눈이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더 걸렸다.이틈에 공격하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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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 일대가 넓다보니 부대를 대대 단위로 쪼개서 방어진을 펼친다.1952년 10월 3일 중국군 38군 114사단에 곡중교가 뜬금없이 투항하게 된다.곡중교가 10월 4일과 6일 사이에 공격 들어온다고 알려주게 된다.김종오 사단장은 믿을만한 정보라며 더욱더 경계를 강화한다.고립될 때를 대비 식량 10일치분도 비축하게 된다.중국군은 10월 6일 예상대로 치고 들어온다.중국군은 축차적으로 병력을 집어넣으며 고지를 뺏으려 시도하나 실패한다.하지만 25분후 부대를 바꾼 후 다시 공격을 들어오게 된다.한국군은 M-36 전차를 동원한다.하지만 9사단 30연대 지역 일부가 뚫리게 된다.한국군은 28연대 1대대 예비대를 동원해 역습에 나서게 된다.고지전 특성상 전체 병력이 다 고지로 기어오를 수는 없었다.로테이션을 돌리다 보니 고만고만한 병력들이 싸우다 보니 승부가 나지 않게 된다.백마고지전투에 포병 화력전도 불꽃튀게 된다.미군은 중국군 포병에 대해 정확한 포격을 날린다.중국군은 동굴같은 데 포를 은신시키며 쏠 때만 포를 뺐다가 집어넣는 방식으로 응수하게 된다.

중국군은 집요하게 공세를 계속하게 된다.10월 7일 0시40분에 포병 사격을 시작으로 몰려든다.사방에서 쏟아지는 중국군에 김종오 사단장은 포병 화력 지원을 요청하며 중국군으로 부터 고지를 사수하게 된다.한국군은 계속 방어를 할 수 없다며 중국군 우측을 치러나가나 중국군은 이를 방어하고 다시 역습을 가하게 된다.분대가 2개 밖에 남지 않고 고지가 중국군에게 넘어갈 위기에 처하게 된다.다시 한국군은 병력을 모아 중국군을 치러 가게 된다.10월 8일 22:00에 한국군은 395고지(백마고지)를 다시 손에 넣게 된다.중국군은 밤에 공격을 주로 했는데 고지전 들어서 낮에도 공격을 감행하게 된다.뺏겼다 찾았다를 반복하게 된다.이 상황에서 백병전까지 벌어지게 된다.밤에는 피아식별이 되지 않아 한국군은 머리를 잡고 짧으면 무조건 개머리판이나 대검으로 상대를 쳐버렸다.부상병과 시신으로 전장은 아수라장이 되버린다.치료하던 위생병 마저도 치료중 총들고 싸우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한국군은 고지를 뺏겨도 남동쪽 고지에서 강력한 포병 화력으로 더 밀리지 않고 힘을 비축하며 다시 반격 기회를 마련하게 된다.중국군도  포기를 안한다.계속 고지에 병력을 교체 투입하며 반격에 나선다.7차공방전이 벌어지고 이 때 보충병력 900여명이 들어오게 된다.게다가 밴플리트 8군 사령관이 이 전선을 시찰하며 독려하게 된다.8번째 공방전에서는 오인 포격까지 발생하며 혼전 양상이 벌어지게 된다.29연대장은 활로가 막히자 5개 중대에서 10명을 차출한다.10월 10일 12:00 이들은 육탄돌격을 감행 중국군 기관총 진지를 날리며 다시 395고지를 탈환한다.

백마고지를 넘어 화랑고지를 먹어야 했다.중국군은 다시 한번 백마고지 좌측을 치고 들어오게 된다.약간 변칙 공격이였다.30연대 1대대 1중대 3소대장 강승우는 전투를 잘하는 오규봉,안영권 병장을 부르고 우리가 중국군 기관총 진지를 깨부수자며 특공대로 중국군 기관총 진지에 돌격하게 된다.결국 소대장과 2명의 병장은 전사하고 활로를 열게 된다.중국군은 다시 11번째로 395고지를 공격한다.이 시기 29연대와 30연대가 교체하는 위기의 순간이였다.하지만 혼선은 벌어지지 않고 무사히 중국군 공격을 막게 된다.10월 12일 30연대가 다시한번 중국군의 공격을 받고 이를 적절히 방어하는데 성공하게 된다.중국군 공세가 확실히 줄어듬을 감지한 김종오 사단장은 29연대를 전진시켜 화랑고지를 공격하게 된다.10월 13일 오후 밴플리트 사령관과 이승만 대통령은 9사단을 방문 장병들을 격려하게 된다.국민의 관심도 이 백마고지 전투에 집중되고 있었다.28연대가 좌우를 막으며 분전하고 29연대가 화랑고지를 터치다운하면서 1952년 10월 15일 오전 11:00 백마고지 전투는 종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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