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평리 전투 승리 후 미군은 공세를 강화한다.횡성과 평창으로 가는 두 축으로 조중 연합군을 분쇄하기로 한다.주력은 미 9군단이였다.선봉은 미 해병 1사단을 내세우게 된다.장진호 철수와 후방에서 게릴라 소탕 임무를 훌륭히 수행한 부대였다.문제는 10군단장 알몬드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이였다.그래서 리지웨이는 미해병 1사단을 9군단에 배치하는 수를 생각한다.이 작전을 킬러작전이라 붙이고 진군을 한다.하지만 적 포위 섬멸은 실패하게 된다.그러기에는 지형이 험난했다.









특히 속사리는 더 안좋았다.지형이 원래도 험한데다가 눈비가 같이 오면서 길이 진창이 되버린다.트럭을 증차하면서 보급에 힘썼지만 이 길을 차가 가기는 어려웠다.이 때 나선 것이 지게부대이다.민간인으로 구성된 이들은 무거운 보급품을 들고 산길 이곳저곳 차가 가지 못하는 곳에 보급을 하러 다니게 된다.미군이 전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뒤에서 보이지 않는 공을 세우게 된다.적을 섬멸하지는 못했지만 미군은 애리조나선까지 진격하게 된다.







리지웨이는 잇달은 철수로 바닥단 병사들을 다독였다.입히고 먹이는데 신경을 많이 쓰게 된다.신형 방한복 공급을 늘리고 식사의 질을 높이는데 힘을 쓰게 된다.항상 전선으로 나가 병사들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리지웨이는 남북전쟁 당시 그랜트의 슬로건을 차용하여 자신의 슬로건을 만들게 된다.적을 빨리 파악하고 신속히 움직여 파괴하는 교리를 만들게 된다.이는 후에 이어질 미군 전투에 슬로건이 된다.한국의 kill chain 도 이를 토대로 만들게 된다.리지웨이는 지형 지물도 세세히 살피게 된다.항공정찰로 얻은 지형을 보고 샛길 까지도 세심하게 챙긴다.미군 병사들은 이런 리지웨이를 보고 wrong way,right way 그리고 리지웨이가 있다며 찬사를 보내게 된다.













리지웨이는 대대적 수뇌부 물갈이도 한다.크리스마스 공세 당시 후퇴를 거듭하던 9군단장을 8군 부사령관으로 밀어 올리면서 현장 전투에 손을 떼게 한다.밀번 1군단장은 병사들 신임이 높아 그대로 유임시키게 된다.그러면서 리지웨이는 1군단 사령부로 자신의 지휘소를 옮겨 밀번을 통제하려 들게 된다.공석인 9군단장 자리는 무어에게 준다.무어는 리지웨이와 웨스트포인트 동기였다.하지만 헬기 추락 사고로 죽게 된다.후임으로 호지가 임명된다.호지는 2차대전때 베를린 진격 당시 정보 부족에도 라인강에서 과감하게 루덴도르프 다리 공격에 나선 인물이였다.리지웨이는 이 모습을 보면서 언제가 한번 써먹어야 겠다고 결심하게 된다.한국군 1군단장도 교체된다.김백일 1군단장이 헬기 사고로 34세의 나이로 죽게 된 것이다.후임으로 백선엽이 임명된다.백선엽은 철수할 당시 중국군과 접촉을 유지하며 리지웨이의 명령을 충실히 잘 따른 인물이였다.





중국군은 유엔군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게 된다.펑더화이는 2월20일 베이징으로 가서 대책을 논하게 된다.펑더화이는 장기전을 감수해야 하며 추가 파병을 건의하게 된다.중국군의 피로가 누적되었다며 돌아가면서 싸우는 로테이션제 도입을 주장하게 된다.그리고 소련을 적극 끌어들여 장비를 지원받기로 한다.이 주장을 마오쩌둥은 수락한다.유엔도 바빠진다.1월만해도 중국은 전황이 유리해서 영국을 위시한 국가들의 휴전을 모두 거부했다.하지만 미군이 전세를 뒤집을 기미가 보이자 유엔은 중국을 침략국으로 규정하게 된다.미국은 전쟁에서 조금 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고 협상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미군은 기세를 몰아 리퍼작전을 구상하게 된다.서울은 방어력이 셀 것이므로 여기를 치기 보다 중앙을 가위 자르듯 싹둑 자르는 작전을 생각하게 된다.적을 둘로 나누어 버려 활로를 모색한다는 것이다.이전과는 다르게 촘촘한 통제선을 짜게 된다.부대간 간격을 최소화 하면서 미군의 강력한 화력을 동원하여 북으로 밀고 올라가는 것이다.이러면 중국군의 장기인 빈틈으로 파고들어 근접전을 벌이는게 어렵게 된다.게다가 이렇게 올라가면서 후방에 마치 상륙작전이 일어날 것 처럼 폭격과 공격을 가하는 것도 잊지 않게 된다.중국군으로써는 인천상륙작전의 악몽이 떠오르며 지연 방어를 펼치면서 후퇴하게 된다.














리퍼작전으로 중국군에게 틈이 생기게 된다.두물머리로 미군 25사단은 도하를 시도하게 된다.전차가 물에 빠지는 우여곡절도 겪지만 도하에 성공하게 된다.서울 동쪽에 적이 몰려오자 펑더화이는 1951년 3월 11일 서울을 포기하기로 한다.리지웨이는 미1군단에게도 한강을 건너 서울로 가라 명하게 된다.밀번 1군단장은 선봉에 한국군 1사단을 세워 깃발을 꽂는 영광을 양보하게 된다.드디어 서울이 탈환된다.하지만 서울은 온전한 건물은 찾을수 없었고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역전다방 > 6.25 전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1951 강화된 중국군 (0) | 2025.12.14 |
|---|---|
| 러기드 작전 (1) | 2025.12.13 |
| 지평리 전투 (0) | 2025.12.13 |
| 제23연대전투단 (1) | 2025.12.09 |
| 횡성전투와 쌍굴전투 (0) | 2025.1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