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군은 붕괴 직전 수준까지 갔다가 중국군 참전으로 회생의 기회를 맡게 된다.초기에는 서로 의사소통이 안되어서 상대진영에 총을 쏘기도 한다.김일성과 마오쩌둥은 만나 조중연합사령부 구성의 필요성을 논하게 된다.사령원은 펑더화이가 맡게 된다.부사령원으로 김웅이 낙점되고 박일우는 전선 부사령관이 된다.중국은 여전히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게 된다.북한은 만주에서 병력을 양성하기 시작한다.5개월 속성 과정을 준비하고 3차 공세에 중국군과 함께 연합작전을 펼치기로 한다.



북한군 3개 군단이 이번 공세에 참여하게 된다.6.25 개전 초기 서울 침투로를 그대로 사용하게 된다.달라진 점이 있다면 밑으로 내려가는 동선이 좀 복잡해진다.전선을 서부,중부,동부로 나누어 이 곳의 빈틈에 침투 적을 분리해서 각개 격파한다는 것이다.






1950년 12월 31일 저녁 5시 중국군은 3차 공세를 시작한다.중국군은 7개 포병대 106문의 포를 동원하여 4000여발을 포격하며 전투를 시작하게 된다.이들이 노린 곳은 한국군이 막고있는 지역이였다.중국군의 기습공격으로 전방에 한국군 1,6사단은 그대로 철수하게 된다.임진강이라는 자연장애물을 이용하려 했으나 겨울이라서 강이 얼어 그대로 도하가 가능했다.임진강은 그대로 무너지게 된다.다행인 것은 비교적 사단이 건재한 채로 철수가 이루어 졌다는 점이다.다음날 1월1일 중국군은 서울 동쪽 가평으로 치고 들어온다.이쪽을 지키고 있던거는 2사단인데 전투 경험이 별로 없었다.42군과 66군이 들어오자 가평이 털리게 된다.





동부전선도 위험해진다.여기는 거의 북한군이 맡게 된다.이 지역은 지형도 험하고 전선도 넓었다.방어하기 불리한 곳이였다.북한군은 한국군 빈틈을 비집고 들어오게 된다.한국군은 나름 철조망을 치고 방어에 힘썼다.하지만 중국군은 국공내전 경험이 있었다.화약자루를 든 침투조가 철조망을 이걸로 파괴하고 이 자리로 보병이 쏟아져 들어오게 하는 전술로 재미를 보게 된다.상황은 매우 안좋았다.전 전선에 걸쳐 유엔군은 밀리고 있었다.






리지웨이는 위기를 감지하고 빠른 철수를 결정하게 된다.1월3일 철수 준비 명령을 하게 된다.이승만은 제발 서울만 사수해 달라고 했지만 여의치 않게 된다.한강라인 방어선도 생각할 수 있으나 결빙이 되어 있어서 병력이 그대로 넘어올 수 있었다.게다가 피난민도 있어서 이들 속으로 중국군이 침투 후방을 교란하면 난리가 난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미25사단장 킨은 철수는 말이 안된다며 적에게 엿이라도 메겨줘야 한다며 리지웨이와 격론을 벌이게 된다.하지만 동부전선도 무너지고 있는 마당에 서울 사수는 힘들었다.1.4후퇴가 결정된다.주력이 철수할 동안 엄호부대로 영연방 29여단과 27여단이 선정된다.






지금은 계곡으로 유명한 송추계곡 일대에서 영연방군은 주력 도망가는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사투를 하게 된다.1월3일 새벽부터 시작된 대공세를 가까스로 막게 된다.1.4후퇴가 결정되자 영연방군도 철수해야 했다.영연방군도 서서히 군대를 뒤로 물리게 된다.밤에 철수하다 보니 조명탄을 쏴서 길을 밝히는데 이게 오히려 중국군 역습을 불러오게 된다.다시한번 중국군과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게 된다.















중국군은 적 전차를 잡기위해 집속 수류탄을 주목한다.방망이 막대기에 수류탄 여러개를 묶어서 이걸 전차 약한 고리에 던지는 것이다.소련은 대전차 수류탄도 만든다.문제는 이게 너무 무거워 휴대성이 떨어진다는 것이였다.막대기 폭탄도 사용한다.영국은 일찍이 철조망 돌파를 위해 막대기 수류탄을 만든다.이걸 일본이 가져다 그대로 써 적 방어진 돌파에 써먹게 된다.중국군은 이걸 보병한테 주어서 탱크에 던지고 나오라고 주문하게 된다.폭약성능이 딸리다 보니 던지는 덩어리는 점점 커지게 된다.나중에는 대전차 지뢰를 여러개 묶어서 활용하기도 한다.오늘날은 기술이 발달해 양말속에 들어가는 폭약만으로 전차를 공격할 수 있게 된다.




중국군의 보병 대전차술로 영국군 전차는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다.난리통에 영연방군 208명은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된다.불미지 마을(고양시 선유동 일대)에서 엄청난 격전이 벌어지게 된다.
















주한미대사관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1.4후퇴를 통보하고 서울을 빠져나가라고 한게 된다.리지웨이는 파머에게 교통담당관이라는 직책을 주고 한강을 통제하라 명하게 된다.1.4오후 3시까지 피난민의 교량 통과를 허용하고 이 시간이 지나면 단 한사람도 넘어올 수 없다고 통보하게 된다.미군은 청야작전을 수행하게 된다.물자를 남쪽으로 신속히 옮긴다.그동안 복구했던 인천항,부평기지,한강다리,김포공항 모두 파괴한다. 미공군과 해군은 나중에 반격하면 요긴하게 쓸텐데 저걸 파괴한다고 하며 아까워 한다.나중에 서울 탈환 후 이 시설들은 다시 복구하게 된다.어째든 미육군은 적의 손에 물자가 넘어가는 일은 막아야 했다.











1950년 6월 피난민은 경황없이 도망갔으나 1.4후퇴때는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피란민은 12월 중순 부터 이미 자발적으로 남으로 내려가고 있었다.소개령이 내려지자 120만 서울 시민 중 84만여명이 서울를 떠나게 된다.1.4후퇴까지 거의 95%정도의 서울 시민이 수도를 벗어나게 된다.정부는 이들을 각 군단위로 수용하게 된다.어떤 곳은 피난민촌이 되기도 한다.피난길이 여유로왔다고 꽃길인 것은 아니였다.필수품은 부족했고 배고픔과 추위에 허덕여야 했다.이산가족들도 이무렵 대거 양산되었다고 한다.1.4후퇴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대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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