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 12월 4일 미8군 사령관 워커는 병력을 물려 38선 근처까지 이동하기로 결정한다.미군은 손절라인을 설정하게 된다.4가지 선을 만들게 된다.최악의 선인 D선까지 만든다.이 결정 당시 동부전선은 중국군에 둘러쌓여 있어서 탈출하고 있고 중국군은 진격할게 뻔했다.중국군이 그대로 밀고 들어와 산을 타고 미군 후방으로 쑥 침투하면 포위 섬멸 당할 우려를 한 것이다.실제로 이전에도 인디언 태형을 받았고 중국군의 산악 기동은 타의 추정을 불허했다.게다가 곳곳에서 북한군 잔당이 유격전을 벌이면서 미 8군은 더욱 혼란에 빠진다.정보의 부재 속에 워커는 최대한 안전빵을 추구하게 되고 이런 배경에 평양과 진남포를 모두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이 철수는 미군 역사상 가장 먼거리 후퇴였다.무려 250km 나 전선을 뒤로 물리게 된다.8군 사령부는 서울로 옮기게 된다.평양 철수전 장비들을 소각하게 된다.하지만 너무 철수를 서둘렀다.전차도 두고 오고 대전차포도 미처 가져오지 못하게 된다.북한군은 M26 퍼싱 탱크를 노획해 후에 중요한 해안 거점에 이들을 투입 해안포로 활용하게 된다.중국군은 대전차포인 바주카포를 노획하게 된다.보병이 이제 미군 기계화 부대에 맞썰 수 있는 무기가 제공된 것이다.이 무기는 관통력이 커서 전차도 뚫는다.오늘날도 대전차포는 게릴라들에게 필수품이 된다.보병도 퇴치하고 전차도 물리치는 1석2조의 좋은 무기였다.







미군의 철수에 많은 피난민이 남으로 가게 된다.우리가 알고있는 피난은 흥남부두 철수가 유명한데 평양 철수도 그에 못지 않았다.피난민들은 끊어진 대동강 철교를 건너게 된다.옷도 신발도 제대로 갖추지 못해 동상을 걸리게 된다.난리통에 수많은 가족들이 이 과정에서 흩어지게 된다.







미군은 동부 전선을 보강하기 위해 1950년 가을경 한국군 3군단을 만들게 된다.탄생 시간이 짧다보니 전투력이 약했다.여기를 메우긴 해야 해서 북진한 한국군을 부르기로 한다.장진호 철수가 한창일 무렵 북진한 한국군 사단 일부가 성진항을 빠져나가 묵호항으로 철수하게 된다.나머지 주력은 미7사단과 3사단 엄호 아래 흥남으로 이동 후 해상탈출을 하게 된다.12월 9일에는 북한군 유격대가 원산을 공격하자 이에 화들짝 놀라 한국군은 원산에서 철수하게 된다.흥남,원산이 이어지고 북한군과 중국군은 공격 활로를 다양화 할 수 있게 된다.








영국 참모 총장은 흥남을 차라리 요새화 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한다.미10군단장 알몬드도 같은 생각이였다.어차피 중국군 화력으로는 요새화된 흥남을 뚫을 수는 없었다.유엔군의 압도적 해군력과 공군력으로 여기에 진을 치고 버티면 제2전선이 형성되는 것이다.그러면 앞으로 벌어질 전투에서 적에게는 목에 가시가 박힌 것 같은 괴로운 상황이 연출될 수 있었다.흥남을 보면 그 당시 가장 발달된 공업 도시였다.게다가 흥남항은 해상 교통의 요지였다.부산항과 비교했을 때 넘사벽 수준이였다.












아쉽게도 흥남철수는 결정되게 된다.흥남철수작전은 세계 역사상 유래를 보기 힘든 철수전이였다.이전의 시라쿠사 원정,덩케르크 철수 작전등은 모양 빠지는 철수가 주류였다.흥남 철수는 비교적 질서정연한 퇴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미군은 미해병 1사단 후퇴를 최우선으로 삼게 된다.동시에 한국군 1군단도 빨리 후퇴시키기로 한다.그 다음 2순위가 7사단이였다.1개연대는 박살 났지만 2개 연대는 비교적 온전한 상황이였다.이 모두 철수하는데 엄호 부대가 필요했는데 이는 비교적 온전한 3사단이 맞기로 한다.










미군 흥남 앞바다에 전함을 가져다 놓고 함포 지원을 하게 된다.해상에서 어마어마한 거포들이 줄지어 중국군에게 포탄을 퍼붓게 된다.함재기까지 띄우며 중국군을 돌려까기를 하게 된다.이런 우세한 화력을 가지고 철수를 한다는게 참아이러니 하다.그리고 철수를 끝내면 흥남부두를 모두 부수기로 결정까지 한다.미군은 그전에 후퇴하면서 하갈우리 비행장 ,장진호 수력 발전소등도 모두 폭파해 알짜배기 시설들이 적군에게 넘어가는 것을 차단하게 된다.




미8군이 무질서한 퇴각을 한 방면 흥남철수는 장비를 살뜰히 챙기게 된다.한국군은 북한군 자주포를 전리품으로 챙기며 철수하게 된다.1950년 11월 29일 부터 미군은 흥남 철수를 위해 가용할 수 있는 수송선을 집결시키게 된다.철수병력은 무려 10만이였다.







유엔군이 철수한다는 소식은 피란민에도 전달된다.이 소식에 무려 10만여명의 민간인이 흥남항으로 몰려들게 된다.수송선단을 집결 시키는 소집령은 발동했으나 불안했다.미군 도일 사령관은 소집령도 불안하다며 지금 하역하는 수송선도 흥남철수작전에 쓰기로 결정한다.35만톤의 물자와 병력 10만여명을 온전히 데려와야 했다.나중에 민간인도 태우게 되는데 이 때 승선도 질서정연했다.당시 승선 영상도 남아있다.영화에 묘사됬던 긴박한 장면은 픽션에 불과하다.







흥남에 피난민은 모여 들고 있었다.현봉학 통역관은 10군단장 알몬드를 찾아가 민간인도 데려가 달라고 간청하게 된다.미10군단은 군사작전에서는 이례적으로 12월9일에 2만명의 민간인을 피신시키기로 한다.중순에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자 알몬드는 피난민 전원을 데려오기로 결정한다.이 발표가 나자 피란민은 안도하고 통제가 되기 시작한다.























한국군 해군도 이 흥남철수를 돕기로 한다.가용한 LST 함을 모두 이리로 투입하게 된다.흥남 철수 작전에 빼놓을 수 없는 선박이 있다.SS 메러디 빅토리호이다.이 배는 2차대전 태평양 전쟁 때 활약한 리버티선을 개량한 빅토리아급 수송선이였다.원래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물자를 날랐는데 흥남철수 소집령을 듣자 바로 하역을 중단하고 흥남으로 가게 된다.하필 하역을 미쳐 못한게 기름이였다.잘못해서 기뢰를 건드리면 대폭팔이 일어날 수 있었다.소해 작업을 마친후 12월 21일 밤에 흥남부두에 접안하게 된다.이 배는 화물선이였다.화물창에 사람을 이빠이 싣게 된다.밤새도록 피란민을 실어 14500여명이 탑승을 마치게 된다.이 배는 많은 피란민을 구한 배로 기네스북에 오르게 된다.미국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공하나가 더 붙은 거 아니냐며 혼선을 빗게 된다.하지만 배안 과 배 갑판까지 꽉꽉 실어 출항해서 이 수는 맞는 수치였다.부산항은 너무 복잡해 내리지 못하고 거제로 가게 된다.이 때가 1950년 12월 26일 이였다.거제 장승포항은 접안 시설이 없어 여기서 LST 를 동원 피란민을 육지에 내려주게 된다.










배안에서 5명의 아이도 태어난다.이들을 미군들은 김치 베이비 1~5호로 명명하게 된다.메러디스 빅토리호는 그 후로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하게 된다.그 후 1991년 영국의 고철 회사에 팔리게 된다.2년후에 다시 이 배는 중국에 팔려 해체된다.이 역사적인 배가 거제도에 있어야 하는데 그 이름이 무색하게 최후를 맞게 된다.이 배 뿐만 아니다.많은 배들이 피란민을 남쪽으로 데려 오게 된다.








모든 철수가 끝나자 흥남 부두를 폭파하기로 한다.이거는 UDT 3팀이 맡기로 한다.이 팀의 전신인 UDT easy는 그전에 핵실험 당시 방사능 오염 지역으로 들어가 샘플을 채취하고 낙동강전선에 유엔군이 방어에 전념하고 있을때 여수로 몰래 잡입 북 수송로인 여수 터널을 폭파시킨 임무를 수행한 부대였다.20톤의 폭약을 여기저기 설치한다.12월 24일 UDT 팀은 폭약을 터뜨리게 된다.미처 배에 싣지 못한 폭약도 같이 폭파되면서 흥남항은 부서지게 된다.1950년 12월 26일 모든 피난민이 하선을 마치면서 흥남 철수 작전은 종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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