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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다방/6.25 전쟁

장진호 철수와 보급 작전

by senamu 2025.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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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회의가 끝나고 10군단의 철수가 결정된다.이미 미군은 중국군에게 엃켜 있어서 빠져나오기 힘들었다.미해병 5연대,7연대는 먼저 유담리를 빠져 나와야 했다.우측의 미 7사단도 신흥리를 빠져나와 하갈우리로 일단 와야 했다.10군단장 알몬드는 하갈우리로 병력을 일단 집결시키라 하고 해병 5연대와 7연대로 하여금 7사단의 철수를 도우라는 명령도 내린다.미해병 1사단장 스미스는 해병도 유담리 빠져나오기 힘들다며 난색을 표명한다.대신 해병대 항공기를 7사단 쪽으로 보내 엄호해 주기로 한다.

하갈우리로 모인다음에 그 다음 철수지는 고토리 였다.1950년 11월 29일 미해병 1연대는 고토리와 하갈우리를 돌파해서 아군의 철수를 돕기로 한다.미해병 1연대장 풀러는 천막을 이빠이 챙겨간다.강추위에 텐트로 덮어서 보온효과를 노린 것이다.영국군 해병대 41특수부대도 이 돌파작전에 참여하게 된다.오후 4시 어둠이 찾아오자 어김없이 중국군이 몰려들게 된다..길이 파괴되고 선두 전차들만 돌격해서 하갈우리에 도착하게 된다.이 전투끝에 240여명은 낙오한다.그리고 후미에 전투원들은 진격하지 못하고 고토리로 돌아간다.하지만 영미 합동군 300여명은 무사히 하갈우리에 도착하게 된다.

하갈우리와 덕동고개에서는 여전히 전투중이였다.특히 덕동 고개의 바버 중대장의 활약은 대단했다.그는 생일을 장진호에서 맞고 있었다.바버는 덕동고개에 올라가자 마자 바로 병사들에게 땅파라고 지시한다.해발 거의 1600미터가 넘는 산을 기어 올라오느라 중대원들이 파김치가 되었는데 무리하게 병사들에게 진지 구축을 명한 것이다.이 판단은 적중했다.이 기반으로 여기서 중국군 3개 대대가 1개 중대를 떼려 잡지 못해 고전하게 된다.바버는 무릎 관통상까지 입었는데 모르핀을 맞아가며 정신을 잃지 않고 부하들을 통솔하려 애쓰게 된다.장진호 우측에 갇혀있던 7사단도 하루속히 하갈우리로 모여야 했다.f-4u 콜세어가 이 철수를 돕게 된다.오폭도 나고 난리통이였다.이 과정에서 연대장 전사로 연대장 된지 얼마 안된 페이스 연대장이 전사하게 된다.7사단은 거의 박살이 나게 된다.부대 단위로 뿔뿔히 흩어져 제 살길들을 찾게 된다. 일부 병력은 얼어 붙은 장진호를 걸어서 건너 유담리로 가게 된다.

유담리에 있는 해병도 중국군 포위망에 걸려 오도가도 못하고 있었다.미해병 7연대장 리첸버그는 정면돌파로는 중국군 포위망을 뚫을 수 없겠다 생각하고 중국군 처럼 야간에 산길로 돌파하는 방법을 구상하게 된다.활로를 뚫을 부대로 데이비스의 1대대를 낙점한다.데이비스는 태평양 전쟁 당시 과날카날에서 폭염을 경험한 전례가 있었다.장진호에 와서는 극한의 추위를 경험하게 된다.1950년 12월 1일 데이비스 대대는 단독군장으로 폭스 중대가 지키는 덕동고개까지 도착 활로를 만들게 된다.이를 시작으로 미군은 우르르 몰려나와 12월 4일 미해병대는 하갈우리에 도착하게 된다.중국군은 이 시기 혹한으로 고전하고 있었다.전투와 혹한으로 사기는 무너지고 있었다.

하갈우리로 일단 오기는 했으나 다음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하갈우리에서 고토리로 가야 했고 다시 진흥리로 가야 했다.여전히 중국군은 이 길목들 곳곳에 병력을 배치해 두고 있었다.10군단장 알몬드는 수송기로 철수를 생각한다.하지만 스미스는 지상 철수를 고집한다.장비를 두고 갈 수 없다는 것이다.그리고 공중 수송을 감행하면 차례대로 병력이 줄면서 수송기에 오르지 못한 인원들은 남아서 엄호를 해야 하는데 그 자체가 위험 천만한 짓이였다.스미스는 해병은 동료를 버리지 않는다며 지상철수를 결심하게 된다.스미스는 철수가 아니라 새로운 방향으로 공격한다며 사기가 꺽일 수 있던 해병들을 다독인다.이런 혹독한 전장에 스미스 얘기까지 겹치면서 장진호 철수는 언론의 관심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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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하갈우리에 무사히 올 수 있었던 것은 공중보급이 한몫하게 된다.하갈우리에도 비행장은 있었으나 활주로가 규정에 미치지 못했다.온도가 낮으면 공기 밀도가 높아져 활주거리가 짧아도 된다.하지만 여기가 고도가 높아 기압이 낮았다.기압이 높아야 유리한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높은 기압,낮은 온도,낮은 습도가 비행기 이착륙에 좋다고 한다.방법은 있었다.비행기 무게를 줄이면 되는 것이였다.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고립된 미군에게 보급을 해주어야 했다.결국 미 5공군은 가용 가능한 모든 수송기를 동원해 물자를 투입하기로 한다.연포 비행장에서 노무자들이 대거 동원되어 항공화물을 적재하고 낙하산 체결하고 수송기에 싣는 작업을 밤새도록 하게 된다.하지만 보급 물자가 받쳐주지 못하자 극동공군 사령관은 서부에 있던 수송기까지 모두 이 장진호에 투입시켜 버린다.

나중에 미군은 장진호의 혹독한 겨울을 겪은 후 방한복을 대폭 업그레이드 하게 된다.방한복도 용도에 맞게 세분화해서 개발하게 된다.이 의류체계는 발전되어 미군은 세계최고 수준의 방한 전투복을 갖추게 된다.

미공군은 1950년 12월 10일 까지 중국군에 고립된 미군에 어마어마한 물자를 공중 투하하게 된다.물자를 보급하면서 부상자 후송도 까먹지 않고 착실히 하게 된다.이 수송 작전에는 그리스 공군도 한몫하게 된다.그리스는 6.25전쟁 때 1개 수송기 편대와 육군 1개 대대를 보내준 나라였다.

장진호 일대에서 벌어진 보급 작전은 어마어마했다.1942년 11월 독소전쟁 당시 독일 6군은 스탈린 그라드를 빠져나와야 했다.소련군을 돌파하려면 탄약과 연료가 필수였다.독일 육군은 괴링에게 물자를 공수해 달라고 요청한다.독일은 융커스 수송기를 사용해서 하루에 116톤 정도에 물자를 공중 투하하게 된다.거의 80여일 동안 이 보급은 계속된다.미군의 보급은 이를 능가했다.거의 하루에 140여톤이였다.수는 미군이 훨씬 적은데도 이런 물자를 퍼부은 것이다.독일의 보급로가 타친스카야 비행장에서 스탈린 그라드까지 였는데 여기 길이가 무려 250km 였다.게다가 소련의 대공포까지 박혀있어서 수송이 여의치 않았다.하지만 미군은 연포비행장을 기점으로 이용하면서 길이가 70km 정도로 짧았다.이런 대규모 공중 보급으로 미군은 적진에서 빠져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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