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군은 MIG-15기의 출현에 황급히 F-86A 세이버를 한반도에 투입하기로 결정한다.항공모함에 비행기를 실어 운반하려면 먼저 부식 방지를 해야 했지만 급박한 상황에 이를 생략하고 태평양을 건너게 된다.원래는 평양에 배치해서 활약했어야 됬으나 전선이 무너지는 바람에 김포 비행장에 배치되게 된다




1950년 12월 15일 F-86A는 김포기지에서 출격한다.관숙비행을 하기 위해서이다.이 비행은 지형이 익숙치 않은 파일럿을 태우고 옆에 교관이 타는 일종에 탐색 비행이였다.12월17일 관숙 비행 중 신의주 상공에서 MIG-15와 F-86A가 조우하게 된다.힌튼 비행 대대장은 아군인지 알았으나 적기라는 것을 알고 바로 전투태세에 들어간다.문제가 있었다. 둘이 생긴게 똑같아 공중에서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힌튼은 베테랑 조종사였다.재빨리 상황을 수습하여 MIG-15 1대를 격추하고 1대는 손상시킨다.첫 교전은 미공군의 승리였다.






이 두개의 비행기가 같아진 것은 독일거를 모방했기 때문이다.미군은 후퇴익 기술이 부족했다.독일 항공학자 부제만이 후퇴익을 만들었다.이 기술을 그대로 미군 전투기에 접목하게 된다.제트엔진 쓴다는 것도 똑같았다.소련도 미국도 영국 제트 엔진을 기초로 엔진을 만들었다.흡기구도 비슷하고 후퇴익도 똑같고 이러다 보니 두 제트 비행기는 배다른 형제가 된다.





힌튼은 처음 MIG-15기를 상대해 보더니 F-86A 가 무장력이 빈약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상대적으로 MIG-15는 폭격기 같은 덩치 큰 기체를 때려 잡으려고 무장을 23mm 기관포 2정 ,37mm 기관포 1정을 장착했다.문제는 연사력이였다.날쎈 전투기를 잡을려면 계속 쏘면서 적을 잡아야 하는데 이게 좀 딸렸다.F-86A 는 기동성과 시야성이 좋았다.MIG-15는 고속으로 비행하면 수직 안정성이 떨어져 스핀현상이 심했다.미공군은 G슈트까지 있었다.기존 프로펠러에서 제트엔진으로 넘어오면서 조종사가 받는 중력 가속도는 점점세지게 된다.이 힘을 받으면 뇌에 혈류가 공급안되 의식을 잃을 수 있었다.G슈트는 이를 어느 정도 막아준다.하지만 소련 공군은 그냥 전투복이였다.1950년 12월 22일 F-86A 16대와 MIG-15 15대가 다시 한번 리턴 매치를 가지게 된다.이 교전에서 F-86A 1대가 격추되고 MIG-15기는 6대가 격추된다.다시한번 F-86A 무장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20mm 기관포로 무장을 강화하게 된다.




1950년 12월 UN에서는 외교전이 벌어진다.1950년 여름에는 미국의 의견이 먹혀 유엔군 구성에 성공했으나 12월 경에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다.상임이사국인 소련은 중국의 선전에 힘입어 목소리를 낸다.소련은 중국을 유엔에 초청하게 된다.소련은 38선을 너어 북진한 유엔군에 큰 잘못이 있다며 이상한 소리를 하게 된다.그전 남진은 거론도 안한다.중국은 미국을 침략국으로 규정하려 했으나 상임이사국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 뻔했다.미국은 38선으로 그냥 원래대로 하고 중국군의 전쟁 개입 중지를 제안하지만 소련이 거부한다.자유진영과 공산진영 대립은 첨예했다.인도를 주축으로 아시아 중동 13개국은 정전을 먼저하고 협상을 하자는 타협안을 제시한다.





1950년 12월 2일 중국군 공세가 뜸해진 시점에 김일성은 베이징에 마오쩌둥을 찾아간다.이 기세로 다시 한번 부산으로 밀고 가자는 의견을 피력하게 된다.마오쩌둥도 마찬가지였다.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다.여기서 협상할 이유가 없었다.마오쩌둥은 정전을 거부하게 된다.마오쩌둥은 방송을 통해 지금의 38선은 무의미하고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자유진영 책임이라 주장한다.스탈린은 적극적 동의보다는 마지못한 동의를 한다.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과연 갈 수 있겠나?하며 의문을 표한다.소련 입장에서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공산진영 이 모든 것을 따져야 했다.반면 마오쩌둥은 신생 공산 국가로써 입지를 다질 필요가 있었다.마오쩌둥은 내심 중국이 이번 기회에 중화민국을 유엔에서 밀어내고 중국이 그 자리에 들어가는 꿈을 꾸게 된다.




마오쩌둥은 지금의 성과에 만족할 수 없었다.미군을 완전히 굴복시키고 한반도에서 철수시키려면 더 큰 한방이 필요했다.펑더화이에게 남진을 재촉하게 된다.펑더화이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유엔군을 밀어내기는 했지만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25%정도의 병력의 손실이 있었고 병참도 엉망이였다.제공권을 미군이 쥐고 있고 막강한 화력은 어찌할 것이며 걱정이 태산이였다.부산까지 가는 것은 어렵다 판단하게 된다.펑더화이는 확실히 중국군의 약점과 미군의 강점을 알고 있었다.그렇다고 마오쩌둥의 의중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펑더화이는 현실적 대안으로 서울을 목표로 하기로 한다.서울만 함락시키면 유엔군이 철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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