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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다방/6.25 전쟁

북진 계획과 조지 마셜

by senamu 2025.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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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은 거의 붕괴 수준이 된다.하지만 아직 주력은 섬멸되지 않았다.이 상태면 38선을 넘어 북한군을 추격하면 격파할 수 있었다.38선은 지금 처럼 철조망이 쳐져 있는것이 아니라 그냥 지도 위의 선이였다.장애물이 없었다.이미 서울 수복전 7월 부터 북진을 두고 국무부와 국방부가 충돌한다.미국 정부는 NSC 81 을 만들어 이를 조율한다.북진은 하되 중국군이나 소련군이 개입하면 유엔군은 그 즉시 전투를 중지해서 추가 확전을 막기로 지침을 세운다.국방부는 불만을 가지게 된다.승리가 눈앞에 있는데 그냥 멈추는 것은 군사적으로 용납이 되지 않았다.이로인해 수정안 NSC 81/1 이 만들어 진다.북한군 섬멸을 위해 압록강및 두만강까지 밀고 들어가는 것을 허가하게 된다.1950년 11월 7일은 중간 선거가 있었다.트루먼은 여기서 승리가 중요했다.6.25전쟁 승리는 이 중간 선거에 호재였다.맥아더는 일단 진남포와 원산을 목표로 북진 계획을 세운다.국방부에서는 9.27 훈령이 내려온다.골자는 중국군과 소련군의 움직임이였다.이들이 움직이면 정부 지침을 기다려야 했다.국경 지역에 작전은 한국군으로 하게 해서 충돌을 방지하는 지침까지 내려오게 된다.

맥아더의 이런 북진에 힘을 실어준 인물이 있었다. 바로 조지 마셜이다.미국방부 장관은 루이스 존슨이였으나 이 사람은 무리한 군축을 단행해서 비난이 쏟아지고 있었다.자연스레 조지 마셜에 힘이 기울어 있었다.조지 마셜과 맥아더는 1880년생 동갑이였다.하지만 맥아더는 엘리트 군인 집안의 금수저였고 마셜은 탄광사업가 아들이였다.상대적으로 군인으로써 불리했다.마셜은 육군사관학교는 못가고 버지니아 군사학교로 가서 장교로 임관하게 된다.마셜은 1차대전이 터지자 참전하고 여기서 미원정군 총사령관 퍼싱의 눈에 들게 되어 42보병사단  작전 참모가 된다.85보병 여단장으로도 활약하는데 마셜은 38세라는 당시로써는 최연소 장군이 된다.맥아더와 악연은 여기서 시작된다.맥아더 부대와 마셜 부대 사이 전투 지경선이 꼬이고 맥아더가 장교 같지 않은 패션으로 전장에 나서자 체포까지 하게 된다.맥아더 군 생활에 오점이 된다.1930~35년 까지 맥아더가 육군참모총장이 되자 맥아더는 마셜에게 앙갚음을 한다.마셜을 진급 안 시킨다.마셜은 한직을 전전하게 된다.그러나 6.25에 오자 마셜이 육군참모총장이 되고 맥아더는 그 밑에 육군 극동 사령관이 된 것이다.마셜은 대인배였다.맥아더가 태평양 전쟁 때 필리핀을 일본에게 뺏기고 철수할 때 사기를 우려해 맥아더에게 훈장을 수여해 준다.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하자 친히 축전을 보내 격려하게 된다.마셜은 정치적 감각이 매우 뛰어났고 군인의 언어와 정치인의 언어를 아는 인물이였다. 트루먼과 맥아더 사이에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한다.서유럽 국가의 공산화를 막기위해 마셜 플랜까지 세운 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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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에서는 외교전이 벌어지게 된다.소련은 1950년 8월 1일 다급하게 유엔에 복귀 목소리를 낸다.미국무장관은 UN 에서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북한군을 격퇴하고 통일된 한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자유진영은 미국편이였다.공산진영은 자유진영에 비해 표가 많이 모자랐다.중국이 발끈한다.중국은 이 당시 유엔이 아니였다.대만이 중국 대표였다.중국은 유엔 참석이 어렵자 인도를 통해 38선 넘으면 참전하겠다는 으름장을 놓게 된다.미국은 허세라며 일축하고 1950년 9월 30일 영국 포함 8개국이 유엔군 북진을 하는 결의안을 제출한다.소련은 다급해진다.평화안을 내놓게 된다.전쟁을 여기서 끝내고 남북한 동시 선거로 총선거를 치루자는 의견을 내놓는다.영국은 유엔군 북진 결의안을 내놓음으로써 미국의 가려운 곳을 확실히 긁어주게 된다.영국은 2차대전 후 미국의 도움이 절실했고 미국은 영연방국가의 표가 필요한 상황이였다.UNCURK(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도 만들게 된다.한반도에 통일정부를 세우고 북진을 허용하는 안이 결국 채택된다.남한입장에서 보면 총선거를 다시해야 되고 북한 자체는 유엔이 인정한 정부가 아니므로 북한 지역은 유엔 관할이 되는 것이였다.

 

북진이 결정되자 세부 지침이 하나둘씩 윤곽을 드러나게 된다.주공을 미 8군으로 하고 조공을 10군단으로 하게 된다.8군이 평양으로 포위기동을 하면서 10군단은 원산에 상륙 북한군을 궤멸시킨다는 계획을 세운다.원산은 당시 북한에게 중요한 도시였다.비행장도 있었고 동부 축선의 핵심도시였다.평양과 원산에 교통로도 뚫려 있었다.미군은 중요성을 알고 개전 초기 부터 원산에 폭탄을 퍼붓게 된다.원산폭격이란 기합은 여기서 유래된 말이다.미 8군을 주력으로 1950년 10월 9일 북진을 위해 미 8군 주력이 움직이게 되고 유엔군 18만 정도가 38선을 넘게 된다.

북진에 앞서서 북한의 지형을 잘 살필 필요가 있다.낭림산을 주산으로 하는 낭림산맥이 동서를 가로막고 있었고 이 산맥에서 갈비뼈 갈라지는 험준한 산맥이 가로막고 있었다.산과 산 사이에는 강까지 흐르고 있었다.하지만 북한 황해도 지역은 연백평야가 있어서 평지였다.대군이 움직임에 있어서 거침이 없었다.과거 임진왜란때 왜군도 이길로 평양으로 진격한다.서울에서 원산가기는 빡셌다.추가령 구조곡으로 매우 좁은 길이 있었다.중간에는 철원평야가 있어서 여기는 비교적 기동이 쉬웠다.이 후 세포와 고산사이 삼방협곡을 넘으면 다시 평탄한 길이 이어지며 원산으로 갈 수 있었다.한마디로 평양과 원산은 남측에서 보았을 때 따로 군사작전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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