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분류 전체보기298 오키나와 상륙 L-Day 1944년 3월 오키나와 수비대가 창설되고 사령관으로 우시지마 마쓰루 중장이 임명된다. 그는 1937년 육군 6사단 제36여단장으로 중일 전쟁에 참전하고 난징대학살에 연루된 인물이다.조 이사무는 참모장이다. 그는 관동군에서 복무했고 역시 난징대학살에 연루된 장교이다. 병사들에게는 금주 금연을 강요하고 자신은 개인요리사를 대동하여 위스키 파티를 벌이는 인물이다. 부대 폭력도 자행하는 무분별한 장교이다.그나마 오키나와 일본군 참모중에 가장 유능한 장교가 야하라 히로미치 이다. 미국 유학파이며 태국 대사관 무관 보좌관도 했었다. 육군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다 차출된다. 1944년 8월 오키나와 육군 제32군에는 무려 4개 사단이 배치된다. 상륙예상 지점 3군데에 병력을 배치하고 남은 병력은 상황을 보아가면서 투.. 2024. 4. 26. 최초의 잠수정 실전 찰스턴항에서는 해군끼리 계속 소규모 전투가 이어진다. 남부는 봉쇄를 풀려고 CSS 버지니아 후속의 작은 버전 CSS 애틀란타를 투입한다. 그런데 변수가 생긴다. 북부가 후속 모니터함에 11인치 포대신 화력이 강한 15인치 포를 장착한다. 이 포로 남군 철갑함 철갑에 구멍이 뚫리게 된다. 포격으로 여기저기 거덜단 CSS 애틀란타는 북군에 나포되고 남군 군함은 북군 군함 USS 애틀란타가 된다.남군은 이대로는 안된다며 대안으로 어뢰정 카드를 꺼낸다. 어뢰정 앞에 장대를 달고 장대 끝에 폭탄을 다는 것이다. 적함을 향해 몰래 장대 길이만큼 다가가 폭탄을 꽂고 터트리는 것이다. 사실상 어뢰의 시초이다. 요즈음 같이 어뢰를 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어뢰를 장대에 꽂아 쓴 것이라 보면 된다.남부 해군은 어뢰정 CS.. 2024. 4. 25. 와그너 요새 전투 북군은 찰스턴항 주변에 육군을 상륙시켜 육해군 합동 작전을 펼치기로 한다. 1863년 7월 10일 와그너 요새를 치러 간다. 백인부대였는데 공격갔다가 패하고 물러난다. 북군은 스왐프 엔젤(늪지대의 천사)라는 사거리가 긴 포를 준비한다. 와그너 요새는 토성에 통나무가 지지하는 형태였는데 이곳을 불사르기로 한다.납과 황그리고 염초,나프타등 휘발성 물질을 섞어 남북전쟁판 네이팜탄을 만들어 와그너 요새를 공격한다. 더불어 긴 사거리를 이용 찰스턴항 내부의 민가 도시에도 공격한다.보우리가드는 민가에 대한 포격을 중지하라고 호소한다. 북군 입장에서는 남부 주민도 반란군이였다.두번째 공격에 흑인부대인 54보병연대가 투입된다. 돌격부대 선봉에서서 와그너 요새에 돌격을 한다. 사인 미스가 났는지 북부 해군의 포격이 예상.. 2024. 4. 25. 54 보병연대와 찰스턴 공략 원래 흑인은 남북 전쟁 초기에는 전투에 참여할 수 없었다. 전쟁 초기 불런에서 보우리가드에게 깨진 후 민병대법 통과로 흑인도 입대하게 된다. 하지만 전투병과는 아니고 참호구축이나 요리 같은 제한된 임무만 수행한다. 하지만 링컨이 1863년 1월 노예예비해방선언 으로 흑인들도 전투병이 되는 길이 열린다. 남북전쟁 기간 중 북군의 복무 병력은 220여만명이였는데 이중 한 10%정도가 흑인이였다.사진에 보면 상처있는 모습이 있는데 이 당시에 육군은 상의를 벗기고 몽둥이로 패고 해군은 이보다 세게 가죽 채찍으로 등짝 스매싱울 한다.흑인이 군인이 되어 제복을 입은 것은 백인과 평등하다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1863년에는 흑인으로만 구성된 보병연대가 탄생한다. 여기 지휘자가 바로 로버트 굴드 쇼이다. 굴드 쇼는.. 2024. 4. 25. 흑색 화약과 게티즈버그 연설 남군이 게티즈버그에서 패한 것은 무모한 돌진과 원하지 않는 전장에서 싸운 것 등 여러 복합적 원인이 있지만 화약도 한 몫한다. 당시 화약을 만드는 법은 숯(석탄)+질산칼륨+황 을 섞는 것이다. 황은 낮은 온도에서 불이 잘 붙고 질산칼륨은 산소를 빠르게 공급한다. 숯은 열심히 타게 된다.이렇게 이들 3개의 물질이 합쳐서 흑색화약이 만들어진다. 이 중 가장 구하기 어려운 것이 질산칼륨 즉 초석(염초)이다. 1830년대 칠레 북부에서 초석광산이 발견되게 된다. 남부는 해상봉쇄로 이 염초를 구하기가 여려웠다. 그래서 박쥐 똥같은 분뇨를 모아 질산칼륨을 만들게 된다.이런 화약을 쓰다보니 포의 위력이 낮을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만 보면 남군이 참 잘싸웠다고 볼 수 도 있을 것 같다. 보급도 잘 안된 상태에서 북.. 2024. 4. 24. 게티즈버그 전투 신임인 북군 미드 사령관은 열심히 남군을 추격해 턱 밑까지 오게 된다. 북군 추격을 감지한 로버트 리는 북군과 결전을 치르기로 하고 흩어진 병력을 캐시타운으로 집결하라고 명한다. 캐시타운을 보니 사우스마우틴을 방패삼아 싸우면 해볼만하다는 결론을 낸다. 집결전에 절대 북군과 전투하지 말라는 명도 내린다. 북군은 지형분석관 워렌과 회의를 거쳐 결전지를 점찍는데 거기가 파이프크릭이라는 곳이였다. 남북군 모두 현 상태에서 유리한 곳에서 전투를 치를 궁리를 하고 있었다.남군은 약탈한 말,양,노새,돼지등 가축 수만마리를 이끌고 집결하기 시작한다. 이러다 보니 북쪽에 있던 이월장군은 캐시타운에 빨리 가기위한 최적 경로를 선택한다. 그 길의 길목에 게티스버그가 있었다. 남군 대다수는 보급이 열악해 맨 발로 행군.. 2024. 4. 24. 마리 퀴리 2부 노벨상 수상 후 피에르 퀴리는 소로본 대학 교수 제안을 받는다 하지만 마리 퀴리는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로 교수로 임용되지 못한다. 사람들은 남편 덕에 상 탔다며 비난하고 그녀가 가정일을 소흘히 한다고 욕한다. 이런 비난에도 마리 퀴리는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바쁜 와중에 딸도 출산한다. 1906년 비극이 일어난다. 남편 피에르 퀴리가 길 건너다가 마차에 치여 마차 바퀴에 머리통이 깨지는 사건이 발생하고 죽게 된 것이다.마리 퀴리는 우울증에 걸린다. 창 밖에 마차들을 보며 저 마차 중에 자기도 하늘나라로 데려갈 마차가 있지 않을까라며 자살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부양해야 하는 두 딸이 있었다. 남편이 죽자 공석이 된 교수 자리에 마리 퀴리가 앉게 된다.소로본 대학 최초의 여성 교수가 된다... 2024. 4. 23. 마리 퀴리 1부 1867년 폴란드 바르샤바의 교육자 집안에서 1남 4녀의 막내로 마리 퀴리가 태어난다. 선생님이였던 마리 퀴리의 아버지는 손수 과학을 가르쳐 주면서 마리 퀴리를 가르킨다. 마리 퀴리는 특히 슬하 자녀들 중 가장 뛰어났다. 6살인 언니가 책을 잘 못 읽자 자신이 뺏어서 읽을 정도로 동년배의 아이보다 월등했다. 한 번 본 것은 다 기억했고 2년이나 월반할 정도로 학습 능력도 우수했다. 많은 과목에서 1등을 놓치지 않는다. 순탄할 줄 알았던 어린 시절에 불운이 닥치기 시작한다. 8살인 큰언니가 사망하고 엄마도 죽는다. 아버지 마저 실직하여 가정은 풍지박살난다. 어려운 가운데서 마리 퀴리는 졸업을 하게 되고 수학과 물리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당시 시대에는 여성이 대학을 갈 수 가 없었.. 2024. 4. 23. 로버트 리 다시 북으로 1863년 중순 이 시기 남부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였다. 남부는 빅스버그가 포위되자 로버트 리의 북버지니아 군을 동원하여 이를 풀려고 한다. 그러나 로버트 리는 반대한다. 압도적 카리스마로 다시 북진할 것을 계획한다. 어차피 북으로 올라가 워싱턴 D.C.를 위협하면 자연스레 빅스버그에 포위된 병력의 압력도 완화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방법이 남군으로써는 유일한 대안이였다. 보급 상황도 열악하고 병력도 열세인 상황에서 먼저 움직여 상대를 치는 것이다. 북부를 완전 굴복은 불가능하고 북부에 위협을 줄만한 행동을 하여 협상 테이블에 앉히려는 포석도 생각한다. 더군다나 메릴랜드와 펜실베니아는 곡창지대로 궁핍한 보급의 남군이 털어 먹을 수 있.. 2024. 4. 23. 빅스버그 포위전 북부로써는 미시시피강 남쪽과 북쪽을 장악하고 이제 남은 것은 중간의 빅스버그와 허드슨 요새였다. 이곳을 장악하면 미시시피강은 완전히 북부 통제하에 둘 수 있었다. 남부 역시 이 지역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미시시피강은 강이 구불거려 배로 공격할 경우 속도를 늦추어야 했다. 이 지역의 고지대에 남부는 해안포를 집중 배치한다. 특히 남부에는 휘파람딕이라는 강력한 대포가 있었다. 이 대포는 포탄이 날아가는 소리가 휘파람 부는 것 같다고 붙여진다. 적에게는 공포의 휘파람 소리였다. 북부는 강상해군의 철갑함으로 이 지역을 공격하려 했지만 번번히 실패한다. 빅스버그 남군 방어 사령관은 존 C. 펨버턴이였다. 이 양반은 북부 펜실베니아 출신이고 그랜트와 같은 학교 선배 였다. 그런데 펨퍼턴의 아내가 남부 출신이.. 2024. 4. 22. 이전 1 ··· 11 12 13 14 15 16 17 ··· 30 다음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