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탈린은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하자 1941년 6월 23일 최고군사결정 기구를 만들고 대응책을 강구하게 된다.6월26일에 전전선에 걸쳐 무너지고 있다는 보고자 들어오자 스탈린은 분노하며 장군들을 질책하게 된다.수도 이전까지 염두에 두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게 된다.다음날 민스크가 떨어지자 스탈린은 자책감에 빠진다.레닌이 힘들게 일으킨 나라가 무너지게 생겼다며 탄식한다.









스탈린은 다차로 이동하여 칩거 모드에 들어가게 된다.이 칩거에 대해 많은 논쟁이 생기게 된다.스탈린 후에 집권하는 흐루쇼프는 스탈린 격하 운동의 일완으로 스탈린이 이 시기 멘탈이 나갔다고 주장하게 된다.후에 서방으로 망명한 소련의 두 명의 역사가는 책을 하나 출판한다.여기서도 스탈린 멘탈 붕괴설에 힘을 실어주는 주장이 써있었다.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주코프가 반박한다.스탈린이 정신줄을 놓은 것은 독일 침공 당시 1941년 6월 22일 하루 뿐이라며 그 날 빼고 정신줄 꽉 잡으며 소련을 지휘했다고 한 것이다.훗날 소련 정치국 자료에서 문서 하나가 나온다.스탈린이 다차에 있던 시절 만난 인사들이 빼곡히 정리된 자료였다.스탈린은 멘탈이 나가 칩거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측근들을 만나며 대책을 논의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된다.







독일 침공에 소련 국민들은 멘탈이 나가게 된다.스탈린은 이들에게 정신차리라 호소할 필요가 있었다.스탈린은 1941년 7월 3일 육성으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게 된다.소련을 이루고 있는 민족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민족성에 호소하게 된다.그리고 주저앉는 자는 필요없다 피 한방울 남을 때까지 결연히 싸우라고 독려하게 된다.불가피하게 후퇴한다면 과거 나폴레옹 침공 당시 처럼 적에게 곡식 한 알도 주지 않아야 한다며 청야할 것을 명하게 된다.더불어 내부 흔들림을 조장하는 자는 엄벌하겠다며 민심의 동요를 막게 된다.














스탈린의 연설은 하나의 구심점이 된다.외부적으로 봤을 때도 소련의 결연한 의지를 보이며 서방 국가들은 소련이 쉽게 무너지지는 않겠구나 생각하게 된다.독일은 소련 슬라브 인종을 열등하다 생각하며 절멸을 생각하고 있었고 스탈린은 이런 독일에 맞써서 뭉쳐야 함을 강조하고 있었다.소련은 러시아 혁명 당시에는 투쟁을 권고하며 남성성을 강조했다.국가가 단합해서 독일을 물리쳐야 할 때 민족성을 부각시키게 된다.효과적으로 선전 효과를 극대하기 위해 어머니 이미지를 차용하게 된다.골타분한 사회주의를 주장한 포스터를 사용한게 아니라 부드러운 모성을 이미지화하면서 소련의 단결력을 강조한 것이다.






단결을 강조했지만 군대는 살벌했다.1941년 6월 29일 절대 사수 명령을 내리고 7월 17일에는 탈영병을 즉각 처형할 수 있는 특수부를 만들게 된다.8월16일에는 270호 명령을 발동 포위된 자에게 항복하지 말고 끝까지 싸우라고 명하게 된다.9월12일에는 탈영병을 잡는 추격대인 독전대도 만들게 된다.병사들뿐 아니라 장군들도 예외가 없었다.개전 한달 만에 서부전선 사령관 파블로프는 총살된다.패한 장군 몇 명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공식적으로는 17~18명이 처형당했지만 알려지지 않은 것도 많고 엔카베데에 끌려갈 생각에 자결한 장교도 많았다.장교들은 잘못하면 죽는다며 이성의 끈을 놓고 무모한 돌격을 감행하거나 말같지도 않은 작전을 수행하며 심한 부작용을 겪게 된다.죽는 장교들도 스탈린 마음대로 였다.자기가 좋아하면 살리고 싫으면 패전의 책임을 물었다.1942년 전선이 안정화되자 장군들 처형이 줄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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