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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다방/6.25 전쟁

펑더화이와 중국군 전력

by senamu 2025.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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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린뱌오에게 한반도에 중국군을 이끌고 들어가는 것을 고려하게 된다.하지만 린뱌오는 이를 고사한다.린뱌오는 황푸군사학교라는 엘리트 코스를 밟고 거기서 두각을 드러낸 인물이였다.후에 중국공산당에 들어가 국민당군을 상대로 전과를 올리게 된다.중일전쟁 당시에는 일본군과 맞써 싸우면서 마오쩌둥의 신임을 얻게 된다.게다가 소련의 군사학교에서도 교육을 이수한 엘리트였다.린뱌오가 고사하자 마오저뚱은 누구를 보낼지 결정해야 했다.주더를 보내자니 노쇠하였고 청첸을 보내자니 정체성 문제가 걸렸다.류사오치나 저우언라이는 군사를 지휘하기에는 너무 행정가 기질이 셌다.자연스레 펑더화이가 낙점된다.

펑더화이는 마오쩌둥과 같은 고향이고 대장정도 함께한 인물이였다.항일 전쟁 당시에도 대활약을 하게 된다.펑더화이에 대한 평가는 우직함이였다고 한다.취미가 장기이고 술담배를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야전 경험도 상당히 풍부해 린뱌오에 비해 딸리는 스펙은 아니였다.용맹과 충성심을 갖추었으나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마오쩌둥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곤욕을 치루기도 한다.하지만 6.25당시에 마오쩌둥은 펑더화이를 매우 신뢰했다.군사 지휘관 뿐만아니라 정치 위원도 겸하게 한다.펑더화이는 참전을 하느니 마느니 논쟁을 벌일 때 한마다를 던진다.우리는 미국에 질 수 도있다.하지만 그러면 어떠냐 몇년 전쟁을 더해서 이기면 된다는 것이다.마오쩌둥은 이 말에 감동을 받게 된다.과거 국공내전당시 홍군의 장정으로 계속 밀리면서도 결국에는 공산당이 중국을 먹은 것을 상기 시킨 것이다.뜬금 없지만 이 홍군의 장정 때 마파두부와 마오타이주가 세상에 나오게 된다.마오쩌둥의 어떻게 보면 군사적 모험인데 이 승부수로 마오쩌둥의 입지는 더욱 단단해 지게 된다.

중국은 미국의 7함대가 오자 위협을 느끼게 된다.현대적 전투기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비빌 언덕은 소련뿐이였다.중국은 소련에게 MIG-15기 지원을 요청한다.스탈린은 처음에 100대를 주려 했다가 이게 너무 많다며 구형인 MIG-9을 더 많이 준다.MIG-9은 문제가 많았다.소련은 야코블레프 설계국에서 독일 기술을 가져다가 YAK  15와 17을 만들고 MIG 9도 만들게 된다.문제는 MIG-9가 출력문제로 무장을 많이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앞에 기관총을 달게 되는데 이걸 쏘면 포연이 흡입구에 들어가 엔진이 멈추는 치명적 결함이 있었다.만든 소련도 이 전투기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중국에게 재고 떨이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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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반해 MIG-15는 최첨단 전투기였다.독일 기술이 뭐가 잘못되었는지 앞선 전투기는 성능이 안나왔다.영국제 엔진을 달기로 한다.소련은 설마 영국이 최신 전투기 엔진을 줄까 반신반의했다.하지만 시기가 좋았다.영국 집권당이 노동당이였다.영국은 소련과의 우호증진을 한다며 이를 수용한다.그러면서 군사적 용도로 쓰면 안된다는 조건을 단다.영국이 이 당시만 해도 냉전에 대해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결국 소련은 독일,소련,영국 기술을 짬뽕시켜서 MIG-15라는 명작을 탄생시키게 된다.

소련의 재고무기 떨이는 여기서 그치지 않게 된다.독소 전쟁 당시 76mm 대공포를 만들었는데 이게 성능이 영 좋지 못했다.이 무기를 중국에 강매하게 된다.나중에 중국은 이 대공포를 베트남과 북한에 판매하게 된다.이런 사실들은 나중에 스탈린이 죽게 되면서 중소관계가 악화되는 요인에 한몫을 하게 된다.

중국군은 참전하면서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인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전한 것으로 중국의 정규군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미군과 유엔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심상이였다.하지만 실제적로는 중국 정규군이 출병한다.중국군은 야전군이 가장 큰 부대 단위다.제4야전군은 그 수가 80만명 정도였다.1950년대에는 그 수가 150만까지 불어나게 된다.이런 야전군이 5개가 있었다.당시에는 평등해야 한다며 보직만 있고 계급은 없었다고 한다.1955년~1965년이 되서야 계급제를 도입한다.야전군 규모는 크지만 사단병력은 11000여명 정도였다.기갑부대도 가지고 있었다.3개 전차 여단이 있었고 총 대수는 90여대였다.일본이 쓰던 전차와 국공내전 당시 얻은 미국 전차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에 반해 미군의 화력은 엄청났다.1개 보병사단에 1개 전차 대대를 배치한다.이 전차대대 한개에 69대 정도의 탱크가 배치되어있었다.전체 여단 전차로 해도 미군 1개 사단의 전차대대에 못미치는 화력을 갖추고 있었다.

포병전력도 빈약했다.1개 포병 사단에 105mm 곡사포 36대가 배치되는데 이는 미군이 가진 보병 사단 포보다 부족한 화력이였다.밑에 부대의 화력은 더 빈약했다.주로 손으로 운반할 수 있는 소구경 박격포나 산포로 무장하게 된다.하지만 전투 경험으로 치면 이는 좀 달랐다.특히 13병단 38군의 전투력은 상당했다.국공내전에서도 혁혁한 전과를 세운 부대로 유명한 부대였다.공산군으로는 병력이 부족하자 과거 국민당군도 사상교육을 시킨후 공산군에 편입시키게 된다.6.25에 참전한 국민당군이 50%정도 였는데 이들은 나중에 전쟁이 끝나고 소환 방식에서 강제 냐 자유 롭게 할거냐를 두고 갈등하게 되는 요소가 된다.

중국의 무기들을 보면 통일된 무기 체계가 아니였다.각국의 무기 집합소였다.서로 호환이 안되는 것은 당연했다.그나마 부대별로는 장비를 통일하기 위해 애를 쓰게 된다.하지만 중국군은 이런 열악한 상황속에서도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을 치룬 경험이 있었다.특히 중국군은 수류탄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상대적으로 수류탄은 생산이 쉬웠다.이러다 보니 중국군이 할 수 있는 전술은 게릴라전 비슷하게 해야 했다.영토에 집착하지 않고 신속한 기동으로 적을 포위 섬멸하겠다는 전략을 구사하게 된다.그리고 약한 고리를 찾아 계속 움직이면서 탐색하다가 찾게 되면 그쪽으로 신속히 군을 움직여 적을 격파하겠다는 전술을 쓰게 된다.유엔군이 차량으로 이동해서 기동이 정형화 되어 있다면 중국군은 걸어다니면서 유연한 군 이동을 구사하고 적의 허점을 치는 전략을 구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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