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전쟁은 지금도 많은 논쟁거리이다.아무래도 자유진영에 국가보다 사회주의 국가가 자료공개에 소극적이기 때문이다.하지만 소련의 붕괴로 6.25 비밀문서들이 하나둘씩 공개되기에 이른다.중국은 1949년 10월에 있던 금문도 상륙 작전도 비밀로 할 정도로 6.25에 대해 많은 것을 숨기고 있다.전통적 관점에서 사회주의 최종 보스인 스탈린이 북한을 도우라고 중국에 지시하고 이걸 중국이 신생 사회주의 국가로써 소련의 입김을 거부하기는 어려웠다.당시 중국에게는 만주가 중요했다.소련과의 교류를 위해서 만주는 필요했고 여기에 자원도 많았다.이런 중요한 만주와 연해주를 둘다 접한 북한이 무너진다면 중국에게는 큰 위협일 수 있었다.미국에 맞써 조선을 돕고 집안과 나라를 지킨다는 항미원조 보가위국을 내세운다.








미군은 6.25가 터지자 마자 가장 먼저 대만에 7함대를 보내 중국이 대만을 침공해서 공산화하는 것을 막게 된다.이 함대가 왔다는 그 사실만으로 중국은 크게 흔들리게 된다.중국과 북한의 특수 관계도 생각해 봐야 한다.2차 국공 내전 당시 만주가 핵심 전장이였다.이 때 중국 공산당은 장제스의 국민당에 밀릴 때 마다 북한으로 피신한 후 거기서 재정비하면서 국만당과 맞써게 된다.북한과는 이전 부터 전쟁을 함께 치룬 혈맹이였다.이런 북한이 미군에게 넘어간다고 했을 때 중국 공산당은 위험할 수 있었다.게다가 참전을 안하게 되면 소련이 만주를 먹어버리고 중국이 동북아 지역에서 소외될 수 있다는 계산도 하게 된다.불안한 사회를 미군이라는 적을 상정함으로써 국민 단합을 시도하게 된다.





1949년 마오쩌둥은 중국을 통일하고 중화인민 공화국을 세우게 된다.하지만 여전히 국민당 세력이 있었다.국민당군 잔당이 거의 100만정도가 중국 도처에 깔려 있었다.이들이 준동하면 다시 중국은 분열될 수 있었다.당시 공산주의는 뭐고 민주주의는 뭐야 하는 국민들도 다수가 있었다.상하이 같은데서는 항미원조 보가위국운동을 벌일 때 2차대전 당시 우리를 도와주었던 미군과 싸우는 것에 거부감 마저 있었다.이런 마당에 미군이 자신의 코앞까지 오면 미군과 내부 반동 세력이 준동하여 어렵게 이룬 중화인민공화국이 날아갈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6.25전쟁에서 중국의 참전 이유는 항상 논쟁거리였다.냉전시대를 거치고 데당트시기가 지나고 1980년대 중국이 개방되면서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중국의 적극 참전설에 힘이 실리게 된다.2000년대에 중국이 강해지면서 부터는 우리는 소련말을 듣고 참전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의지로 미국과 맞써 싸워 승리했다며 이를 적극 주장하기 시작하게 된다.3차 중동전쟁 때 이집트가 군사 행동하려는 조짐을 보이자 이스라엘은 선제 공격을 감행한다.중국도 마찬가지 였다.장래의 위험을 막기 위해 예방 전쟁을 치룬 것이다.








마오쩌둥은 사방간데서 미국이 중국을 조여온다며 저우언라이를 통해 소련에게 자신들의 처지를 읍소한다.마오쩌둥은 어차피 미국과 싸워야 한다면 자국이 아니라 남의 땅 북한에서 싸우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게 된다.하지만 중국 내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아직 힘이 모자라니 중공업 좀 키운후 미군과 맞써자는 주장이 팽팽히 맞써게 된다.마오저뚱은 전쟁나면 어차피 미공군이 다 싹날릴텐데 그때 싸우는 것보다 지금 싸우는게 나을 것이라 주장한다.주더와 류사오치는 이에 엄청 반대한다.마오저뚱은 반대파를 제압하기 위해 펑더화이를 중앙으로 불러들이고 저우언라이를 소련에 급파 스탈린에게 도와달라고 간청하게 된다.소련이 답이 없자 마오저뚱은 결단을 내린다.10월 13일 중앙 정치국 회의에서 소련이 참전안해도 우리는 미군과 싸우겠다는 것을 발표한다.









마오저뚱이 참전을 결정하자 군수뇌부 사이에서도 논쟁거리가 된다.참전을 지지한 세력 중에는 가오강이라는 인물이 있었다.가오강은 만주지역에 입지를 다지면서 동북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군사적 재능은 떨어지지만 권모술수에 능했다.그는 6.25전쟁을 기회로 보고 있었다.자신이 속한 만주지역이 보급기지로써 중국군을 지원할 테니 다른 세력들 보다 차기 권력 구도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는 꿈을 꾸게 된다.하지만 가오강은 지나친 친소파였다.1949년 12월 마오저뚱과 스탈린이 회담을 하는데 여기서 스탈린에게 과도한 아첨을 해서 마오저뚱의 눈밖에 나게 된다.








이제 우리가 알만한 인물들이 등장하게 된다.중국군은 항상 정치위원과 군사 지휘관이 쌍으로 이루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중국은 국민당 정부와 맞써기 위해 5개 야전군을 만든다.그 중 1야전군에 시중쉰 정치 위원이 있었다.시중쉰은 계속 권력을 쥐고 달리다가 문화대혁명 기간동안 반동분자로 몰려 고초를 겪게 된다.그 후 다시 복권되고 그의 아들 시진핑은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덩샤오핑도 등장한다.제2야전군 정치위원이 덩샤오핑이였다.1978년 덩샤오핑은 중국 3대 최고 지도자가 된다.









마오쩌둥에세 절대적으로 따르는 군사지도자들은 그 기원을 국공 내전 당시에 벌어진 홍군의 장정을 알아야 한다.1930년 12월 장제스는 100만 대군을 동원 공산군 소탕전을 벌이게 된다.1930년 부터 34년 까지 5차례 총 토벌을 감행하고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군은 심하게 쪼그라들게 된다.중국 공산당은 근거지인 루이진을 포기하고 탈출하게 된다.포위망을 뚫으려다 보니 거의 유격수준으로 산을 타고 강을 넘게 된다.10만명 중 3000여명만 옌안에 도착하게 된다.이 장정에서 마오저뚱은 농민의 지지를 이끌어 낸다.이 장정을 함께한 군지휘관은 이런 마오저뚱의 리더십을 보고 절대 충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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