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군은 평양을 점령하고 북한군이 붕괴되자 특수부대를 보내게 된다.바로 문서 수집 특수 부대이다.미8군 소속 2사단 특수 임무대는 평양 시내를 돌아다니며 북한의 문서를 수집하게 된다.이 문서는 RG 242로 분류되게 된다.이 자료는 6.25 전쟁 당시의 북한 상황이나 한국의 역사를 보다 심도있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중요 문서가 된다.









미군은 평양을 점령하면서 북한군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또 하나의 특수 작전을 바로 준비한다.바로 공수 부대를 후방에 투입해 북한군 퇴로를 차단 주력을 섬멸하려는 작전을 세우게 된다.원산 상륙 작전을 밀어 붙인 것도 사실은 적 후방을 급습 북한군 주력을 포위 섬멸하려는 의도였다.미 187 공수연대 라카산 부대가 이 임무를 맡게 된다.라카산은 낙하산의 일본식 발음이다.평양 북쪽 40km 위에 순천과 숙천에 이 부대를 투입해서 여기를 점령 평양에서 도망가는 북한군을 포위하려 한다.하지만 북한군은 재빠른 철수로 포위해서 격파하는 작전은 실패한다.하지만 187공수 연대와 위로 계속 올라오는 영연방 27사단이 조우하면서 이 지역도 유엔군이 접수하게 된다




1950년 10월 19일 맥아더는 자신이 세운 맥아더 라인에서 조금 더 진격하기로 한다.더 전진해서 북한군을 압박하는 전략을 생각하게 된다.하지만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평양과 원산을 이어보면 180여 km 정도라서 여기는 방어라인 구축하기가 그나마 용이했다.그 위로 더 올라가면 한반도 지형 상 갑자기 폭이 확 늘어나게 된다.방어할 라인이 배로 늘어나는 것이다.9.27훈령에서 중요한 것은 북한군 섬멸이였다.신맥아더라인까지 올라간 후 그 이후 북진은 주변국을 자극하니 한국군만 하도록 방침을 세우게 된다.10월 22일 유엔군은 라인을 신맥아더 라인까지 올리게 된다.이 시기 중국군은 한반도로 들어오고 있었다.평양과 원산라인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면 역사는 달라질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 역사는 이와는 반대가 된다.















맥아더는 이때까지 전쟁이 순조롭다고 여기게 된다.트루먼은 맥아더를 만나 현 상황을 논의하기로 한다.맥아더는 트루먼이 자신을 선거에 이용한다며 불쾌감을 드러내게 된다.해리먼 보좌관이 먼저와서 불을 지피고 1950년 10월 15일 맥아더와 트루머는 웨이크섬에서 조우하게 된다.이 곳이 채택된 것은 거리상의 이유였다.당시 수송기가 최대로 갈 수있는 거리는 4000~5000km 였다.트루먼은 맥아더가 전시에 고생한다며 비행기를 3번이나 기착하면서 웨이크 섬으로 오게 된다.이렇게 태평양 섬에서 수뇌부들이 모인 것은 2차대전 당시에도 흔한 일이였다.주요 수뇌부들이 모여서 전후 한반도 처리,일본과의 평화조약,영국 프랑스 식민지 처리등 아시아 대해 전반적으로 논의하는 자리가 된다.



맥아더는 이 웨이크섬 회담에서 전쟁 승리에 대한 낙관론을 내세우게 된다.최악의 경우 소련군이 참전하는 것인데 아마 소련군이 집결하려면 6주는 걸릴 것이고 그 전에 전쟁은 끝날 것이라 확신한다.중국 지상군과 소련 공군이 동시에 한반도에 들어오는 경우에 대해서도 맥아더는 중국군과 소련군의 능력이 미군의 능력에 뒤진다며 승리를 확신하는 주장을 하게 된다.하지만 실제적으로 회담 이틀 전인 10월 13일 중국군은 움직이고 있었다.유엔의 여러 나라도 미군과 같은 생각이였다.영국의 M16 비밀 정보국은 소련과 홍콩에 정보망이 있었다.비교적 서방 나라 중에서 중국 소식에 대해 접근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였다.M16은 중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보고 했으나 자유 진영 국가들은 그런거는 노이즈라면서 희망회로를 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