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대표적 가문 3개가 있다.로스차일드,합스부르크,메디치 가문이다.메디치 가문은 원래 평민 집안이였다.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무젤로에서 조반니 더 메디치가 태어나고 25살에 은행업을 선택한다. 당시 은행은 예금과 대출 후 이자처리 그리고 외환 거래까지 오늘날과 별 차이 없는 업무였다.원거리에 돈을 옮겨 주는 계좌 이체 서비스도 존재했다.조반니는 은행업과 자본금을 모으기 위해 로마로 가서 친척의 은행에서 직원으로 취직한다.여기서 업무를 배우고 나중에 이 은행을 인수해서 피렌체로 귀환한다.동업자와 함께 피렌체에 은행을 개업한다.피렌체는 중세유럽에서 은행업이 가장 발달한 곳이였다.
조반니가 은행업에 전념하는 동안 교회는 3조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필리프 4세가 강력한 힘으로 교황청을 로마에서 아비뇽으로 옮기면서 교황청이 분리 되었고 여기서 더 쪼개져 3명의 교황이 있는 혼란한 시기가 계속된다.이렇게 교황이라고 서로 우기는 것은 엄청난 이권이 개입되있었기 때문이다. 매년 교황청에 한 나라의 1년 예산에 버금가는 돈이 왔다갔다 했기 때문이다.이 엄청난 돈을 관리하는 업자가 바로 피렌체의 은행 업자였다.수십여개의 은행이 피렌체에 난립했다.조반니도 교황청에 들어오는 현금을 관리하기를 원했고 때마침 발다시레 코사 라는 인물이 메디치 은행을 찾아온다.그는 차기 교황이 되겠다며 조반니에게 돈 좀 빌려달라고 한다.이전 부터 조반니는 코사를 주목하고 있었다. 코사는 교회법 분야의 권위자였고 셀럽이였다.조반니는 기회로 보고 베팅을 한다.이권이 걸려있다보니 교황 선거는 금품 선거 였다.교회 성직도 돈으로 매수할 수 있는 시기였다.코사는 1410년 요한 23세 교황이 된다. 요한 23세는 바로 메디치 은행을 주거래 은행으로 지정하게 된다.
베팅에 성공하는 듯 했으나 5년후 종교 회의에서 3명 교황을 모두 폐위하고 마르티노 5세가 새 교황이 된다.요한 23세는 동성애 ,매관매직,전임 교황 독살 여러 협의로 투옥된다.막대한 벌금까지 부과되었다. 조반니는 한 마디로 새가 된다.하지만 조반니는 한 번 맺은 고객을 버리지 않았다. 조반니는 은행업을 하면서 신용과 신뢰를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다.조반니는 벌금도 물어주고 요한 23세를 감옥에서 꺼내준다.거처와 생활비도 주면서 신의를 다한다.요한 23세는 감동하고 죽을 때 손가락을 준다.참으로 비싼 손가락이다.당시에는 성직자의 신체 일부를 신성한 것이라며 귀히 여겼다고 한다.조반니는 요한 23세가 죽자 도나텔로(르네상스 조각 거장)을 시켜 화려한 무덤까지 만들어 준다. 이런 조반니를 새 교황 마르티노 5세는 눈여겨 보게 된다. 마르티노 5세는 메디치 은행을 교황 전담은행으로 지정하게 된다.
메디치 은행은 승승장구하게 된다. 조반니의 장남 코시모가 가문의 사업을 이어받게 된다.코시모는 어렸을 때 부터 사업가 기질이 있었다. 여러가지 언어에도 능통했다. 은행 교육도 받고 좋은 학교도 다닌다. 교황과 가문을 등에 업고 사업을 본격적으로 키우게 된다.은행을 이제 프렌차이즈화 해서 유럽 여러 곳에 지점을 만들게 된다.유럽 왕과 귀족들도 메디치 은행과 거래를 하기 시작하게 된다. 돈 빌려주고 여러 이권도 가져온다.1460년대는 백반 광산을 독점하게 된다.중세 유럽에서 직물업은 중요한 제조업이였다.이 직물 염색에 백반이 쓰였다.돈을 갈고리로 긁게 된다.가문은 번성하여 문양도 화려하게 바꾼다. 원래 가문의 문장은 왕이 하사하는 것이였으나 메디치 가문은 자체 힘으로 문장을 만든다.
'벌거벗은 세계사 > AD_1200_1499'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스만 제국과 커피 1부 (0) | 2024.06.22 |
---|---|
메디치 가문 2부 (0) | 2024.06.08 |
콜럼버스와 정복자들 3부 (1) | 2024.05.15 |
콜럼버스와 정복자들 2부 (1) | 2024.05.15 |
콜럼버스와 정복자들 1부 (1) | 2024.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