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이 무력 사용을 승인한 전쟁은 2024년 현재 2개 뿐이다.하나가 6.25전쟁이고 다른 하나가 걸프전쟁이다.그런데 걸프전쟁은 6.25와 다르게 유엔군은 결성하지 않는다.다국적군으로 불리는 이유이다.지휘체계도 이원화 된다. 미국을 위시한 군대와 아랍국가 끼리 뭉친 아랍연합 두 갈래로 갈라지게 된다.6.25 때는 공산주의 국가로 부터 남한을 지키자는 한가지 목적 뿐이였으나 이 때는 달랐다.전쟁에 참여해서 경제적 이득을 얻으려는 국가도 존재하게 된다.우리나라는 석유 수입국으로 눈치를 보다가 아랍국가들이 연합국을 결성하자 늦게 파병을 결정하게 된다.놀라운 것은 프랑스가 미국 휘하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아랍으로 들어간 것이다.이 당시 프랑스는 핵개발 문제로 나토에 탈퇴했었다.나중에 사막의 폭풍 작전 때에는 미국으로 들어가고 2009년에는 나토도 재가입한다.프랑스 역시 과거 부터 중동문제를 중시했던 나라였다.여러 나라가 어수선한 틈을 타 기회를 노리는 단체들이 움직이게 된다.IRA 는 걸프전쟁 논의 중이던 때 영국 총리 관저에 박격포 공격을 가한다. 북부 이라크 쿠르드족은 전쟁을 이용해 독립을 시도하게 된다.
UN 안보리 결의안 678호에 의거 1991년 1월 15일 까지 이라크는 쿠웨이트에서 철수하라고 최후통첩을 보내게 된다.사담 후세인은 이를 거부한다.후세인은 승산이 있다고 보았다.이란-이라크 전쟁으로 그동안 사모았던 무기도 많았고 당시 추정으로 세계 4위의 막강한 군사력으로 판단되었다.병력만 100만이고 전차와 야포 수천대가 있었다.이라크은 미군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들어오면 이 전 베트남 전쟁처럼 미국을 수렁에 빠뜨릴 생각이였다.방공망도 막강했다.서방 전투기들이 하늘에 떠도 방어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더군다나 후세인은 어느 정도 희생을 감당할 수 있었다.독재국가이기 때문이다.하지만 미국은 한 5천여명 죽으면 반전여론으로 전쟁이 지속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다.여기에 후세인 주변 아첨꾼들은 맞짱구까지 쳐주니 후세인은 어서 들어오라며 벼르게 된다.미국은 사막의 폭풍작전을 세우게 된다. 압도적 전력으로 짧은 시간에 이라크군을 박살내겠다는 것이다.UN 결의안은 11월 29일에 통과되었지만 미군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유럽에 미 7군단이 아직 안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후통첩을 1월로 정한 것이다.이렇게 정한 것은 라마단 기간도 한 몫한다.이 당시 라마단은 3월 중순부터 4월 중순인데 이 때는 매우 신성한 기간으로 금식하고 기도하느라 전쟁 수행이 아예 불가능했다.라마단 끝나면 여름이고 사막에서 여름은 싸울 수 없는 기간이였다. 심사숙고하여 1월 중순으로 전쟁날짜를 정한 것이다.
마지막 까지 요르단은 중재하려 하나 이라크는 이대로 발을 빼면 면이 스지 않는다며 거부한다.미국은 폭격을 더 구체화 한다. 1단계에서 제공권을 장악하고 그 다음으로 대량살상무기와 쿠웨이트 지역 방공망, 미사일 기지 제거를 하기로 한다.3단계에서 이라크 지상군을 공격하고 4단계에서 지상군을 근접지원하기로 한다.다국적군 공군기가 사우디아라비아로 집결하고 걸프만에 미 해군함정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전함 2척도 투입된다.USS 미주리라고 태평양전쟁에서 항복조인식을 했던 그 전함도 등장한다. USS 위스콘신 전함도 들어오게 된다.이들은 모두 아이오와급이다. 과거 레이건 정부 시절 미국은 소련을 상대하기 위해 600척 해군 계획을 추진하게 된다.그래서 아이오와급 전함이 재취역하게 된다.소련은 여기에 대항하려고 해군력 증강에 나섰다가 파산한다.
미군은 본격적으로 폭격하기전 이라크군을 기만하기 위해 드론을 대거 이라크로 보낸다.치고 빠지기를 반복해 이라크 레이다 시설에 피로를 주게 된다.이라크군은 드론에 미사일을 발사 미군 전투기를 격추시켰다며 기뻐한다. 아이오와 전함들은 포로만 무장된게 아니였다. 토마호크 미사일로 무장이 업그레이드 되어 있었다.1991년 1월 17일 USS 미주리 전함이 토마호크 미사일을 발사하고 다국적군 전투기들이 일제히 이라크를 폭격하러 간다.보이지도 않는 스텔스기인 F-117을 필두로 F-16등 수많은 전투기들이 이라크 상공에 출현하고 전략목표물을 차례차례 타격한다.제공권이 쉽게 뺏기지 않을 것이라 이라크는 예상했으나 하루만에 제공권은 다국적군에게 넘어간다.제공권이 날아가자 B-52가 융단 폭격으로 이라크군을 공격한다.아파치헬기 와 A-10은 상공에 이라크 전투기가 없자 마음대로 하늘을 휘저으며 이라크 지상군을 격파한다.
이라크가 공습당하자 이 과정은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전쟁 과정이 생중계된다.미국은 1980년대 부터 종군기자들에게 훈련을 시킨다.베트남 전쟁 이전 까지 많은 종군 기자가 있었고 그 중에는 죽은 사람도 있었다.미국 입장에서는 알 권리도 중요하지만 이들을 보호할 필요도 있었다.게다가 베트남 전쟁 때 무분별한 언론 보도로 반전 여론이 들끓으면서 실패했던 경험도 있었다.그래서 미국은 NMP(National Medial Pool) 을 만들고 승인받은 방송사와 기자들에게만 취재를 허락하는 정책을 시행한다.여기에 최대 수혜 받은 방송국이 바로 CNN이다.CNN 기자들은 이스라엘 정보부 지인으로 부터 이라크에 전쟁이 일어날 것 같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특종을 노리며 이라크에 입국한다. 결국 이들은 호텔에서 개전 첫날 바그다드 폭격을 생중계하게 된다.
1991년 1월 24일이 되자 이라크군은 아예 항공작전을 하지 않게 된다.공군력을 비축하기로 하고 전투기를 꽁꽁 숨긴다.지상전을 통해 다국적군과 결전을 벌이고 이를 전투기가 지원하기로 방침을 바꾼 것이다.하지만 공습은 거셌고 이라크 공군 중 일부가 이란으로 피신하게 된다.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사이가 두 나라가 안 좋을 텐데 이런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란은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먹은 것을 비난하지만 반미국가로 미국을 위시한 다국적군이 페르시아만으로 들어오는 자체가 싫었다.더군다나 후세인은 전쟁 준비를 하면서 뒤에 적을 남길 수 없다며 이란과 미리 화해를 한다. 알제 협정을 복귀하고 이란에게 많은 것을 양보했다.1990년 8월 부터 9월에는 전쟁 포로도 교환하게 된다.후에 2000년대 들어서 이란으로 날아온 항공기를 이란은 22만 돌려보내고 나머지는 꿀꺽한다.이라크가 항공작적으로 박살나자 1991년 1월 27일 미중부 사령관 슈워츠코프는 우리가 제공권을 완전 장악했다고 선언한다.불과 일주일만에 이라크군은 힘 한 번 못쓰고 하늘을 다 내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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