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마자 NSC 를 소집한다. 여기서 사우디아라비아를 이라크로부터 보호해야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쿠웨이트에 들어온 이라크군은 어떻게 할 지는 격론이 오고 간다.일단 사우디아라비아에 미군을 파견하기로 한다.사우디아라비아는 난감했다.지금이야 사우디아라비아가 군사력이 어느 정도 있지만 당시에는 약했다.그렇다고 메카의 수호자이자 아랍의 맹주인 사우디아라비아가 비굴하게 미군의 보호를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였다.미국은 그런 사우디아라비아를 설득하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다.아랍국가들도 이라크를 비난하자 사우디아라비아는 못 이기는 척 무군의 주둔을 허락하게 된다.
미국은 재빨리 제82공수사단 제2여단 2300여명을 급파한다.적은 병력이지만 사우디아라비아 침공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였다.미군 총사령관은 노먼 슈워츠코프였는데 혹시 이라크가 미군이 준비되기 전에 침공할 까봐 어마어마한 대군이 있는 것처럼 언론 플레이를 하여 이라크를 기만한다.10월말 까지 미군은 20만을 사우디아라비아에 집결시키게 된다.아랍국가의 체면을 생각해 아랍합동군을 국경에 배치시킨다.자유로운 미군이 들어오자 보수적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문제가 생긴다.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술도 못 마시고 더군다나 성경책은 반입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였다.나중에 미군 기지를 통해 반입이 되기는 한다.여성 복장도 문제가 된다.당시 사우디아라비아는 여성이 운전할 수 없을 정도로 여성규제가 심한 나라였다.미군으로써는 남의 나라 지키러 와서 이런 꼴을 당하다니 불만이 속출한다.더군다나 아무런 군사 작전 없이 대기하는 시간만 길어지고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지키려는 사막의 방패작전은 한없이 늘어지고 있었다.남의 나라 들어가서 식량과 연료를 계속 축 내고 있었다.미국은 이라크를 경제제재로 봉쇄할까도 생각한다.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라크를 공격하자는 쪽으로 추가 기울게 된다.슈워츠코프는 실제로 미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이다.그는 이라크를 공격할 방안을 만들게 된다.물론 이 사람은 4스타이기 때문에 실제 작전 짜는 것은 아랫것들이 하게 된다.그들이 바로 고급군사교육과정을 받은 엘리트 장교들이였다.작전내용은 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정면에서 알짱거리고 크게 우회하여 쿠웨이트에 있는 이라크군 좌측을 치는 계획이였다.그런데 현재 병력으로는 이라크 정면밖에 못치므로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내용을 대통령에게 브리핑한다.그래서 얼마자 죽냐고 묻자 한 만명이 사망한다고 대답한다. 이 브리핑을 듣자 수뇌부는 술렁인다.슈워츠코프의 의도는 병력을 더 달라는 것이였다.
수뇌부 중에는 딕체니가 있었다. 그는 후에 럼스펠트와 미국의 힘을 과시하자며 네오콘을 형성하게 된다.하지만 이 당시에는 그리 강경파는 아니였고 파월을 많이 믿었다고 전해진다.콜린 파월은 자메이카 이민자 출신으로 굉장히 입지적인 인물이다.베트남 전쟁 영웅이였고 주한미군에 복무하기도 했다.승승장구하며 국방부와 육군의 요직을 거치며 아프리카계 미국인 최초로 합동참모분부장으로 임명된다.1986년 콜드워터-니콜스법은 군의 합동성을 강화하기 위해 합참의장 권한을 대폭 강화 시켜 준다.이 법으로 파월은 수혜를 보게 된다.군과 대통령을 비롯 수뇌부에 중간에 서서 의견을 전달하는 정치도 알아야 되고 군사적 지식도 있어야 하는 어려운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파월은 개인적으로 슈워츠코프를 전적으로 밀어준다.슈워츠코프가 군사력이 더 필요하다고 하자 파월은 이를 수락하고 군사력을 더 사우디아라비아로 보내게 된다.
유럽의 미 7군단을 사우디아라비아로 보내기로 결정한다.베를린 장벽도 무너졌고 소련힘도 약해져서 이 군단을 빼올 수 있었다.7군단 증원은 1990년 11월 8일 미대통령 부시가 공식적으로 발표하게 된다.미 7군단 전력은 어마무시하다. 병력은 139000여명 정도 이고 전차 수천대와 곡사포 , 로켓발사 차량 , 공격 헬기 250여 대등 막강한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에서 악재가 터진다. 부시의 공화당이 중간선거에 패배하게 된다. 더군다나 미군 증원 발표가 되자 전쟁이냐며 반전 여론도 들끓는다.정치권도 꼭 이라크와 전쟁을 해야하냐며 외교적 노력이나 경제제재등을 거론하기에 이른다.특히 베트남전쟁을 설계한 로버트 맥나마라는 베트남 전쟁의 실패를 잊지말라며 반대한다.부시는 뭔가 명분을 찾아야 했다.이라크는 자국에 있는 미국인을 함부로 하지 못하고 1990년 12월 부터 쿠웨이트에 억류된 외국인의 출국을 허용한다.명분이 더 없어지게 된다.부시는 국제질서를 회복하고 사담후세인은 나쁜 놈이고 쿠웨이트를 해방하는 도덕적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며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 1990년 11월 22일 추수감사절에 사막의 방패 작전을 수행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주둔 미군 부대를 찾아가 병사들을 격려하기도 한다.여기서 부시는 사담 후세인이 핵무기로 미본토를 칠 수 있다며 경각심을 준다.나라를 뺏긴 쿠웨이트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미 정치권에 가서 오일 머니로 여기저기 기름칠을 한다.특히 쿠웨이트 어느 소녀를 내세운다. 이 소녀는 이라크군이 갓난아기를 죽이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봤다며 눈물로 호소하고 이는 미 전역에 방송된다.이 방송으로 여론이 전쟁하자쪽으로 점점 기울게 된다.하지만 이 소녀는 미 쿠웨이트 대사 딸로 이라크 만행을 눈으로 볼 수 없는 애였다.부시에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였다.반전여론이 꺾였다는 것이 중요했다.부시는 석유뿐아니라 베트남전으로 실추된 미국의 명예를 올릴 필요도 있었다.
본격 전쟁 준비를 위해 어마어마한 물자가 사우디아라비아에 집결하게 된다.차량 11만 7천대 전차와 장갑차 1만2천대 그리고 탄약 40만톤 연료 80만톤이 사우디아라비아로 수송된다.미군은 이 장비들을 움직일 어마어마한 석유가 필요했다.사우디는 최대 석유 수출국이였지만 군에서 쓰는 막대한 연료가 모자라 석유 수입국으로 전락하게 된다.음식도 엄청 필요했다.이슬람 식의 할랄푸드는 미병사들 입맛을 맞출 수 없었다.거의 중소도시 하나가 어느날 갑자기 사막한가운데로 출현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보급을 원할하게 하기 위해 제22지원사령부까지 편성하게 된다.각 종 첨단무기도 속속 사우디아라비아로 집결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