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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다방/태평양 전쟁

과달카날 전투 2

by senamu 2024.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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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육군사관학교를 수석졸업하고 육군대학도 3등으로 졸업하는 엘리트 출신 장교이다.

1939년 할힌골 전투를 독단과 월권으로 불씨를 키워 4개월간 전투로 키운다.

말라야 전역에서 승리하여 육군참모본부 작전반장으로 진급한다.

야마시타 도모유키(말레이 반도 침공 지휘관)은 그를 교활한 인물로 평가해 요직에 앉히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바탄 죽음의 행진 배후로도 지목된다. 포로를 엄중 관리하라는 대본영 지시를 [포로를 처형하라] 라고 왜곡 전달한다.

작전 실패의 책임을 아랫사람에 돌리는 인물이다.

일본은 이 사람을 과달카날 전투에 참여 시키기로 결정한다. 일본 육군에서는 이 사람이 작전의 신으로 불린다.

허나 이 사실은 뒷 내용이나 여러 정황상 과장되고 부풀려 진 것으로 추정된다.

나중에 패전 후 전범 재판도 빠져나가고 1952년 중의원에도 당선된다. 일본 내의 시각과 외의 시각이 많이 다른 인물이다.

 

 

1942년 10월 14일 15일 에 걸쳐 마루야마가 지휘하는 일본 제2사단이 과달카날에 타사파롱가에 상륙한다.

1942년 10월 15일에 화물선 3척을 미군 공습으로 잃고 10월 17일에는 해안에 쌓여있던 보급품마저 미군 공습으로 또 잃는다. 상륙과정에서 이미 식량 절반과 탄약 80%를 읽고 공격을 시작한다.

일본은 부대를 둘로 나누고 기습을 위해 주공부대를 정글을 통과해서 가기로 한다. 이 루트를 마루야마 루트라 부른다. 정글 통과하느라 덥고 습한 기후에 배고픔 까지 닥치자 군인들은 무거운 중화기를 버린다. 이래도 되나?

 

결국 행군은 늦어져 주공과 보조공으로 협공하려 했으나 따로 공격을 하게 된다. 10월 20일 새벽에 조력이 공격했고 그 후 5일 후에 주력이 공격한다.

일전에 에드슨 능선 전투에서 참패했던 가와구치 기요다케는 츠지 마사노부에게 우회 공격을 제안한다.

츠지 마사노부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총공격 전에 그를 해임한다.

총공격전 지휘관 해임으로 뒤숭숭한 분위기에서 공격이 개시되고 미 해병대의 압도적 화력으로 공격은 실패한다. 미군 피해도 만만치는 않았다. 미 육군은 제164보병연대와 추가 예비대를 증원해서 핸더슨 비행장 전투에서 승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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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8월 미국과 뉴질랜드는 연합 부대인 캑터스 항공대를 창설한다. 기지는 핸더슨 비행장으로 한다.

일본의 제로 전투기는 과달카날을 공격하려면 라바울 항공기지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 거리가 1000km 이다. 제로 전투기 21형 항속거리는 2300km 로 공격 후 돌아와야 하므로 몇 분 밖에 작전을 하지 못한다. 핸더슨 비행장에서 끊임없이 이륙하는 항공대를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였다. 더군다나 먼거리 공격으로 조종사들의 피로도 누적된다.

1942년 10월 26일 육군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 항모 기동부대와 미국 항모 기동부대가 산타크루즈 해전을 벌인다.

미국은 항모 호넷이 격침당하고 엔터프라이즈가 피해를 본다. 항공기 81대도 잃는다.

일본은 쇼카쿠와 즈이호 항모가 피해를 보고 항공기 99대를 상실한다.

1942년 11월 12일 부터 15일 까지 2차례 야간에 과달카날 해전이 벌어진다.

여기에서 일본은 참패하고 재해권을 잃는다.

 

 

일본 육군 2사단이 무참히 패하자 일본은 38사단을 동원해 상륙작전을 감행한다.

홀시 제독이 버티는 미군은 이를 저지한다. 일본군 다수가 수장되고 겨우 2000명(사단 병력의 1/10) 만 상륙한다.

과달카날 해전이 끝나갈 무렵 야마모토 사령관은 함대를 철수시키고 고립된 육군이 물자를 가져갈 수 있도록 수송선 4척을 좌초 시킨다. 여기에 실린 무기와 식량은 10000 톤 정도 였다.

날이 밝자 미군은 이 물자들을 포격하여 잿더미로 만든다.

일본 육군은 완전 고립되고 4일치 식량이 남는다. 그러나 대본영 철수 명령은 약 70일 후에나 떨어진다.

[고립된 일본군 생존기간 판별법] 이라는 게 있다. 서있는 자는 30일, 부축받고 있는 자는 20일, 누운채로 용변보는 자는 3일, 말 못하면 2일, 돌아눕지 못하는 자는 다음날 이라는 내용이다. 당시 처참한 실정을 보여준다. 극단적 선택도 속출한다.

 

이 상태에서 미해병대는 일본육군을 완전 격멸하기 위해 KO 작전을 감행한다.

대본영은 철수를 결정하고 퇴각로를 뚫기 위해 1943년 1월말 렌넬 섬 해전을 벌인다. 미 중순양함 1척을 침몰시키고 구축함 1척을 대파한다. 케호작전이라 부르는 3차에 걸친 일본육군 철수 작전으로 10600여명을 데려온다.

 

 

과달카날 전투는 미국,일본 양국의 엄청난 소모전이였다.

일본 해군은 1942년 11월 과달카날 포기를 주장한다. 일본 육군은 그동안은 계속 승승장구해왔기에 과달카날 전투의 참패를 용납하지 못해 손절하지 못했다. 대본영은 과달카날 참패를 승리했다고 선전한다.

미국은 과달카날 전투 승리로 불침항모 섬의 유리함을 체감했고 각군이 함께 움직이는 입체전을 터득하게 된다.

 

람보와 미해병대

 

1775년 11월 10일 미군 대륙 해병대가 창설된다.

태평양 전쟁 전까지는 해안 경비나 해군 기지 방어 이정도의 임무만 수행했다.

일본 육군 2사단 3000명이 반자이 돌격할 때 기관총 분대 하사 바실론이 있었다.

당시 미 해병대는 M1917이라는 수랭식 기관총을 썼다. 무겁고 뜨거운 이 기관총을 바실론 중사는 손에 대는 것도 개의치 않고 들고서 일본군을 향해 들고 난사한다.

그는 미해병대 최초로 명예훈장을 수여받고 교관이 된다. 수랭식 기관총을 거치식이 아니라 위급할 때는 들고 쏘라고 군인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이 모습은 후에 영화 람보의 모습이 된다.

그는 1945년 이오지마 전투에서 전사 후 해군 십자훈장에 추서된다.

그때까지 존재가 미약했던 미해병대는 바실론을 홍보했다. 미해병대는 과달카날 전투를 통해서 입지를 다닌다.

태평양 전쟁에서 섬 장악을 위해서는 당연히 상륙작전이 중요했고 미해병대 위상은 점점커진다.

미해병대는 미디어와 정치권에 자신들의 활약상을 홍보한다.

미해병대는 한국전쟁과 60년대를 거치면서 신속즉응군으로서의 이미지를 다진다.

1970년대 미육군은 개혁을 단행한다. 미육군이 너무 인기가 없던 시절이였다. 1973년 미국은 모병제로 전환한다.

미해병대는 모병할 때 더 강하게 슬로건을 건다. 가장 먼저 적과 싸운다라는 슬로건이다.

 

갑 사건

 

과달카날 전투 후 미국은 비행장을 더 건설한다.

일본은 라바울에서 남은 항공전력 400여대를 동원 1943년 4월 7일부터 15일까지 이호작전을 개시한다.

미군에 견제구를 날렸으나 성과는 미비했다.

이호 작전 후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장(진주만 기습 주도)은 직접 전선에 가서 병사들을 격려하기로 한다.

당시 일본 부대장이 이러한 행보를 하는 것은 이례적이었다.

1943년 4월 18일 오전 8시 시찰단은 라바울을 출발한다. 호위 전투기 6대를 대동했다. 시찰단은 2대의 폭격기를 나누어 탔는데 1대는 야마모토 사령관 일행 다른 1대는 우카기 참모장 일행 이 탔다.

미군은 감청을 통해 시찰 일정을 사전에 알게 된다.

니미츠는 이 사실을 루즈벨트에게 알리고 그를 암살하기로 결정한다.

공격에는 P-38전투기 18대를 준비한다. 이 전투기는 당시 가장 항속거리가 길고 12.7mm 중기관총 4문과 20mm 기관포를 갖추고 있었다. 호위기인 제로 전투기를 확실히 제압할 수 있는 전투기를 택한 것이다.

이 날의 작전명은 복수 였고 공교롭게도 둘리틀 공습 1주년이었다.

일본군 감시를 피하기 위해 크게 우회한 P-38은 오전 9시34분 사찰단을 발견하고 집중 공격한다.

결국 야마모토가 탔던 폭격기가 격추되고 탑승자 전원 사망한다. 이를 갑사건이라고 한다.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 후 암호가 뚫렸을 가능성을 염려했다.

1942년 8월 15일 부터 암호서를 세분화하고 암호 코드집과 난수표도 자주 교체했다.

갑사건 이후 우가키 참모장은 살아남고 가장 먼저 미군의 암호 해독 가능성을 의심한다.

일본 해군은 그 가능성을 조사한다.

갑사건 이전 겨우 2주전에 난수표가 교체되어서 사실상 해독은 불가능 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미국은 암호 해독을 자신들이 했다는 것을 모르게 할려고 갑사건은 초계비행하다 우연히 얻어 걸린것이라는 연막전을 펼친다.

난수표는 자주 바꾸면 해독이 어렵다. 하지만 허점이 있었다. 난수표가 새로 나오면 각 전선에 배부를 해야하는 데 그게 녹록지 않았다. 결국 새로운 난수표를 통신 기지국에서 그 전에 썼던 난수표를 이용해 송신한다.

일본 육군과 알력 다툼이 있었던 일본 해군은 꼬투리 잡힐까봐 이를 은폐한다.

연합함대장 호위를 맡았던 6인의 조종사는 갑사건 후 죄책감에 시달린다. 처벌은 면했지만 위험한 일에 자청하는 등 죄를 씻기 위해 노력한다.

이 후 전투로 5명은 전사하고 1명은 1943년 6월 7일 교전 중 오른손을 잃어 본국으로 송환된다. 이 사람은 1970년대 침묵을 깨고 당시 상황과 자신의 죄책감에 대해 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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