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남태평양 라바울에 요새를 삼고 거점으로 삼는다.
1942년 5월 3일 일본은 툴라기를 점령한다.
일본은 미드웨이에서 대패했고 불침항모의 필요성으로 1942년 7월 과달카날에 비행장을 건설한다.
이 지역은 피지,사모아 ,뉴기니, 아울러 호주가지 견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섬도 제주도에 3배 만하고 해군 함선 보급및 비행장 건설에 최적지였다.
미국은 남태평양을 공략하기 위해 솔로몬제도로 진공 후 라바올을 공격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작전의 주도권을 놓고 어니스트 킹(미 함대 총사령관)과 맥아더(남서태평양 지역군 사령관)은 대립한다.
일본이나 미국이나 둘다 해군과 육군은 사이가 좋지 않은가 보다.
미합참은 이를 중재하기위해 남태평양해역군 사령부(SOPAC)을 구성하고 사령관으로 로버트 공리를 앉히고 실세는 니미츠 제독이 된다.
이 시기에 일본군이 과달카날에 기지를 건설하는 소식이 들려오고 미국은 1942년 8월 7일 해병1사단 11000명으로 망루작전을 개시하여 과달카날을 상륙한다. 완전 무혈입성이였다.
과달카날에는 건설노무자 2700여명(조선인 2000여명) 이 있었고 병력은 430명 정도여서 미군이 상륙하자 모두 도망친다. 이 지역에 비행장 건설을 주장한 사람은 이노우에 시케요시(일본해군 4함대 사령관) 이였는데 그는 미군이 이 지역을 절대 못오리라 예상했다.
미국의 반격에 일본은 놀랐고 적의 수송선을 격침하기 위해 함대를 모은다.
1942년 8월 7일 미카와 군이치 중장이 함대를 긁어 모아 중순양함 5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1척으로 출진한다.
야간에 기습하기로 하고 기함 쵸카이를 선두로 뒤에 군함을 따라오게 하는 단순한 작전이였다.
일본 함대는 1942년 8월 9일 새벽 사보섬 해역 인근(툴라기와 과달카날 사이) 에서 적함및 수송선을 발견하자 마자 일제히 어뢰및 함포 사격을 가해 연합군 중순양함 4척을 침몰시키고 1023명의 군인을 전사시킨다.
기습 공격이 성공하자 일본은 공격을 멈추고 도망간다. 참모들이 더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 항공기에 의해 항모가 격침당하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군이치는 서둘러 도망간다.
1866년 화이트헤드 어뢰라는 현대식 어뢰가 등장한다.
어뢰는 적함을 일격에 격침할 수 있는 위력적인 무기였다. 게다가 소형 구축함에서도 운영이 가능했다.
군축회담으로 큰 군함을 가질 수 없자 일본은 더욱더 어뢰 개발에 몰두한다.
문제는 짧은 사거리 였다. 연소된 압축공기로 프로펠러를 돌리는 방식이였는데 이 방식은 한계가 있었다. 이를 높이기 위해는 고농축 산소로 연료를 연소시키면 되는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된다.
영국이 산소 57% 고농축 산소 어뢰 배치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일본에 전해진다. 이게 잘못 와전되어 100% 고농축 산소 어뢰가 개발된 것으로 잘못 알려진다. 일본은 의욕에 불타오르고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일본은 1933년 고농축 산소 어뢰인 93식 어뢰를 개발한다. 함포 사거리와 맞먹는 수준까지 끌어올린다.
일본은 함대 결전에서 이 어뢰를 수백발 쏴서 적함을 격멸하는 작전도 준비한다.
이 산소 어뢰를 장착한 순양함이 사보섬 해전에 투입되어 톡톡한 재미를 보게 된다.
사보섬 해전으로 미해군과 상선이 격파당하자 그 전에 상륙했던 미해병 1사단은 보급을 걱정해야 했다.
일본군이 건설하다가 만 비행장을 일본이 두고 간 장비로 완성시킨다.
일본군이 두고간 음식을 먹고 버텼다. 점심시간만 되면 라바울에서 날아온 폭격기가 이 지역을 공습해
이 시간을 [도조타임]이라고 불렀다. 미군은 밥도 못먹고 폭격을 피해 다닌다.
미해병 1사단은 부대 마크에 과달카날이라고 새겨져 있을 만큼 여기서의 전투는 인상적이였다.
미해병 1사단은 6.25전쟁 때도 대활약한다. 장진호 철수에서 12만명의 중공군을 막아낸 부대이다.
일본 육군 이치키 지대는 원래는 미드웨이 작전 성공시 상륙하게 되어 있었는데 실패하자 과달카날 상륙작적에 투입된다. 일본군은 미군이 유약할 것으로 예상해서 승리를 장담한다. 800여명이 해안에 상륙해 돌격을 시도했으나 미해병대의 압도적 화력으로 전멸되고 20여명만 살아남는다.
미국은 M1919 기관총, M1917 경기관총,박격포, 산탄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일본은 이런 중화기가 없었다.
미해병은 사전에 상륙작전도 알았다. 그 전부터 해안 감시대로 원주민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원주민 해안감시원 [자콥 보우자]를 사로 잡는다. 그는 총검에 찔린 채로 포박을 풀고 도망쳐 미해병에 일본군 상륙 사실을 알린다. 그는 전쟁 후 미국 은성훈장,공로훈장 및 영국 조지훈장을 수여받는다.
테나루 전투로 당황한 일본은 병력을 라바울로 집결시킨다. 맹활약하던 일본 육군 제2사단도 참여시킨다.
문제는 병력과 물자를 수송이 중요하게 되는데 과달카날 핸더슨 비행장에서 전투기들이 일본 수송선을 공격한다는 것이였다. 일본도 라바울 기지에서 1000km 나 날아와 전투기로 수송선을 엄호하나 한계가 있었다.
일본은 야간 전투에 많은 훈련과 기습훈련을 반복해서 밤에 특화되있었다. 로버트 공리는 소극적이여서 적극적 전투를 꺼린다. 결과적으로 이 둘이 맞물려 밤에는 일본이 장악하고 낮에는 미국이 활개치는 형국이 계속된다.
일본은 통통배 수준의 나룻배로 밤에 천천히 병력과 물자를 이동시킨다.
이 방법으로 가와구치 키요다케 제35보병여단 소장은 병력과 물자를 이동시킨다. 이 수송으로 도착전 1000명 중 350명이 사망하고 구축함으로 수송된 6500여명은 살아서 도착한다. 통통배 탄 사람은 고생만 하다가 죽은 것이다. 무슨 강도 아니고 태평양을 통통배로 하다니 ... 일본은 핸더슨 기지를 기습하기 위해 밀림지역을 뚫고 뒤로 돌아가 공격한다.
초반에는 성공하나 증원된 미해병대의 공격을 받는다. 1942년 9월12일 부터 14일 까지 에드슨 능선 전투가 벌어지고 일본군은 참패한다.
일본은 개전 초 남방자원을 수송하기 위해 상선을 운용하기로 한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전 독일의 U보트가 상선을 침몰시킨 예를 이용해 예상 상선 피해를 산출한다.
그 결과 년간 10%정도 잃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일본은 상선을 육군용,해군용,민간용 이렇게 따로 운영한다. 좋은 상선은 해군이 다 가져간다.
일본 해군은 육군의 상선 보호에 소극적이였다.
일본 해군은 10000톤 이상만 군함으로 인정하고 일왕의 국화 문장을 단다.
상선 같은 것은 그냥 소모품으로 여긴다. 일본 육군 잔전요무령이라는 것이 있다.
내용은 보급에 기대지 말고 즉각전인 빠른 공격으로 전투에 승리하라는 것이였다.
육해군 모두 보급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1942년 11월에 일본 육군 2사단이 고립되는 일이 벌어진다.
상선 37만톤을 요청하나 일본 정부와 육군성은 거부한다. 다나카 신이치작전부장이 거듭 요청하나 도조 히데키도 반대한다. 자국민이 아사 직전에 놓여있는데도 강건너 불구경한 것이다.
로버트 공리는 미군 희생에 주저하다가 해임되고 1942년 10월 남태평양 해역군 신임 사령관으로 윌리엄 홀시가 임명된다. 윌리엄 홀시는 압도적 물량으로 일본군을 격퇴하기로 한다.
루즈벨트 대통령도 1942년 10월 24일 미 합참에 과달카날에 물량을 우선 투입하라고 지시한다.
소모전으로 아이언 바텀 해협이 생긴다. 침몰한 미일 양측의 선박이 57척인데 가라앉은 배들이 바다 바닥에 쇠바닥을 깐 것처럼 되었다하여 이런 이름이 붙여진다. 윌리엄 홀시는 전쟁중인 장병들도 직접 찾아가 격려하는 따뜻한 지휘관이나 일본군에 대해서는 더 많이 죽여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