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처칠은 2차세계대전 동안 미국 루즈벨트에게 거의 2000통의 편지를 보내 구애한다.
진주만 공습이 있기전 처칠과 루즈벨트는 만나서 대서양 헌장을 만든다.
내용은 두 나라는 영토 확장을 추구하지 않는다. 식민지의 주권과 자치가 회복되기를 바란다. 등 자유무역과 민주주의 원칙을 담고 있다. 전쟁의 목표와 원칙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한다. 이 헌장은 후에 UN 헌장의 모태가 된다.
아르카디아는 신화에 나오는 땅으로 [목축의 신]이 다스리는 낙원을 말한다.
2차대전 끝나고 낙원을 구축하려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진주만이 공습당하자 처칠은 다급해진다. 미국이 유럽에 신경써주길 바랬는데 갑자기 일본이 튀어나온것이다.
독일 U보트가 대서양을 활개치는데 이런 위험을 무릎쓰고 처칠은 대서양을 건넌다.
1941년 12월22일 부터 다음해 1월 14일 까지 미국에서 아르카디아 회담이 열리게 된다.
미국,소련,영국,중화민국이 전쟁선언에 동참한다.
나치독일에 항복한 국가및 중남니 국가, 영연방국가도 공동선언을 결의한다.
내용은 각국이 단독으로 강화하거나 휴전하지 않고 또한 연합참모희의 CCS를 구성해 군 작전을 논의한다.
한마디로 주축국에 공동 대응한다는 내용이다.
영국은 2차대전이 일어나 위기에 빠져 미국의 도움이 절실했다.
1940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루즈벨트가 3선에 도전할 때 처칠은 간절히 루즈벨트의 당선을 기도한다.
루즈벨트는 당선되고 1940년 12월 8일 처칠은 장문의 편지를 보낸다.
내용은 지난 5주 동안 독일 U보트가 상선 200만톤을 격침 시켰으니 상선 300만톤이 필요하다. 비행기도 2000대 필요하다.하지만 돈은 없다. 즉 미국의 유럽에 대한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지원을 약속한 미국은 조건을 건다. 첫째 영국국고회계를 감사권을 미국이 갖는 것이다.
영국의 전세계에 퍼져있는 유무형 자산을 미국이 알게 된다. 그 결과 남아프리카 케이프 타운에 금괴가 잔뜩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처칠은 매우 당황한다. 미국은 USS 빈센스(CA-44)로 금괴를 가져온다.
둘째 미국에 있는 영국 기업 소유권을 이전한다. 2차 대전 후 미국은 이를 비싸게 되판다.
미국은 1940년 9월에는 미국의 앞마당 버진 아일랜드 기지를 가져오고 1차 대전에 쓰던 구형 전함 50척을 영국에 준다.
영국령 서인도 제도등 7개 지역의 영국 공군기지도 가져온다.
영국의 참모들은 너무 과하다며 처칠을 만류하지만 처칠은 1차대전 빚을 지금 갚는거라며 미국의 조건을 수용한다.
진주만 공습을 당하자 미국인은 분노하고 루즈벨트는 합동참모본부에 일본을 칠 것을 주문한다.
문제는 일본이 너무 멀었다. 천상 항공모함으로 가서 폭격기를 이륙시켜 공격해야하는데 폭격기가 커서 이륙에 문제도 있고 착륙시에도 활주로가 짧아 위험했다.
프랜시스 로우라는 잠수함 함장이 여기에 항공모함에서 폭격기를 이륙시켜 일본 본토를 공격하고 중국으로 착륙시키는 묘안을 짜낸다. 이 안은 채택되고 일본에 반격을 준비한다.
1930년대 항공선진국끼리 비행기 레이스 대회가 열린다. 이 때 둘리틀이라는 사람이 슈나이더,벤딕스,톰슨등 3대 항공레이싱에서 모두 우승한다.미국은 육군항공대 최정예요원을 선발하고 대장으로 둘리틀을 앉힌다.
B-25B 폭격기 항속거리를 늘리기 위해 경량화 작업을 시작한다. 둘리틀은 항공모함 이륙훈련을 지상에서 실시한다. 작전은 알려 주지 않고 짧은 거리 약 100 m 이륙 훈련을 계속 한다.
작전 당일에서야 대원들은 일본 공격을 알게 된다. 운없게도 1942년 4월 18일 아침 일본 초계기에 발각된다. 일본에서 1200km 떨어진 지점이였다.
둘리틀은 결정해야 했다. 작전을 감행하느냐 마느냐에서 그는 결정한다.
작전을 속행하기로 하고 대원들을 독려한다.
예정 시간보다 10시간 빨리 출격을 결정한다. 둘리틀은 가장 앞서서 (가장 짧은 이륙거리) 폭격기를 타고 이륙한다. 가장 먼저 모범을 보인 것이다. 그 뒤로 차례로 15대 폭격기 모두 이륙에 성공한다.
1942년 4월 18일 정오 무렵 도쿄 상공에 B-25B 폭격기가 나타나고 B-25B는 폭탄을 떨어뜨린다.
어두운 밤에 작전을 해야 하는데 낮에 해서 굉장히 위험했다.
둘리틀 폭격대는 1대는 소련으로 12대 중국 불시착 3대는 중국 영해로 추락한다.
이 폭격으로 일본이 입은 피해는 경미했다. 그러나 폭탄 중 일부가 일왕 황궁 근처에 떨어졌고 13세기 이후 일본은 본토가 공격 받은 적이 없었서 군부가 이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는다.
둘리틀은 귀국 후 일본 본토에 처음 폭탄을 날린 사람이 되어 영웅이 된다.
용기와 리더쉽을 인졍받아 명예훈장도 받는다.
남방 장악 후 일본 해군 계획은 다음과 같다. 호주를 방어하는 뉴기니의 핵심 항공기지 포트 모르즈비를 접수하기로 한다. 일본 해군과 육군 7사단 훗카이 지대로 알류산 열도를 공격한다.
일본 해군과 육군 7사단 미치키지대로 미드웨이를 공격한다.
사모아,피지,뉴칼레도니아를 공격한다. 이러면 거의 태평양이 앞마당이 된다. 이런 장미및 청사진을 꿈구고 있는데 난데없이 미군 폭격기가 날아와 펀치를 한대 먹은 것이다.
이런 계획을 수립한 마당에 둘리틀 공습 후 방공망이 뚫리자 일본은 서둘러 대공 방어를 강화하기 시작한다.
더군다나 일왕 황궁 근처에 폭탄이 떨어진 것은 큰 불충이였다. 해군의 태평양 제압 작전이 힘이 실리고 육군도 찬성한다. 일본 해군과 육군이 연합하여 특별육전대를 편성한다. 일본은 먼저 포트 모르비즈로 향한다.
미 기동함대는 일본의 이런 계획을 간파하고 먼저 공세에 나선다.
이 해전은 최초의 항모 결전이자 함포가 아닌 함재기로 싸운 해전이였다.
미국과 일본 양국이 제대로 붙은 해전이였다. 양국의 손실은 막대했다.
여기서 미국은 중요 항모 2척을 잃게 된다. 미국은 결국 포트 모르비즈를 지키고 일본은 철수한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함 함대 사령관은 둘리틀 공습 후 판이 깔리자 미국 태평양 함대와 일전을 주장하고 안들어 주면 사퇴하겠다고 군령부를 압박한다.
이 사퇴론은 진주만 공습 때도 통했다. 위상이 높아진 이소로쿠의 계획을 결국 군령부도 수락하고 연합함대는 미드웨이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