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 반도 침공과 거의 동시에 필리핀 공격이 시작된다.
필리핀은 수도 마닐라가 있는 북부 루손, 중부 비사야스 남부 민다나오 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일본의 목표는 수도 마닐라였다. 개전 당시 병력은 일본군 4만3천여명 정도 였고 나중에 13만 까지 불어 난다. 미군은 약 3만명 그리고 필리핀군은 12만명 정도 였다.
일본 해군은 항공모함 함재기로 일본 육군은 타이완 비행장에서 육군 항공대로 필리핀 전역의 해군기지와 비행장을 폭격한다. 특히 1903년 완성된 태평양 중요 거점 클라크 미 공군기지를 박살낸다.
루손섬에서 190km 떨어진 바탄섬을 일본 해군 육전대 14군 일부 병력이 상륙해 바스코 비행장을 점령해 폭격을 돕는다. 공습과 동시에 일본 육군은 루손섬 북쪽 (비간, 아파리) 지역과 남쪽(레가스피) 지역에 상륙해 미군 비행장을 공격한다 .
제공권 장악 후 북쪽 링가예만에 일본 14군 48사단이 상륙하고 남쪽 라몬만을 통해 14군 제16사단이 상륙한다. 이 때 일본군 병력이 4만 3천여명 정도이다.
필리핀 상륙시 일본은 전차 4연대 7연대에 각종 전차 100대가 있었다. 마닐라 입성시 까지 승승장구 한다.
바탄에서 미군 M3 스튜어트경전차를 만난다.
M3 경전차는 일본군 전차 포탄을 튕겨내는 반면 M3의 37mm 대전차포에 불과 25mm 두께를 가진 일본군 전차는 모두 박살난다.
한 일본 장교는 미군 전차를 이기기 위해 고철 장갑을 덧대어 효과를 본다.
이 장교는 일왕의 무기에 결함이 있을 수 없다는 황당한 이유로 처벌 받는다.
일본군 전차 부대는 1942년 4월 9일 까지 고전한다. 나중에 포를 개량한 97식 전차 개량형이 급히 투입된다.
당시 필리핀 방어의 책임자는 더글러스 맥아더였다.
맥아더는 1930년대 경제 불황으로 군축을 하려하자 루즈벨트에게 반기를 들어 육군 참모 총장에서 물러난다.
좌천된 후 필리핀으로 가서 일본의 침략에 대비한다. 본국에 수차례 지원을 요구했으나 기대에는 못 미쳤다.
1941년 7월 미극동군 육군 사령관이 된다.
원래 미군의 계획은 마닐라만에 입구에 버티고 있는 바탄반도에서 버티다가 본국의 지원으로 일본을 격퇴하는 작전을 수립한다. 이 계획이 레인보우5 였는데 맥아더는 이에 반발해 필리핀 전체를 방어하려 든다.
맥아더는 개전 후 B-17 폭격기로 타이완 일본군 비행장을 공습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바탄으로 철수를 결정한다.
맥아더는 1942년 3월 루즈벨트 명령으로 호주로 철수한다.
이 때 마지막까지 항전하는 모습으로 미국에 언론 플레이를 한다.맥아더는 정치 야망도 가지고 있었다.
1948년 대통령 선거에 출사표를 던지나 공화당 전당 대회 경선에서 낙선한다.
훌륭한 장군임에도 독단적인 성향이 있다. 필리핀에서 일본군을 과소 평가하고 6.25 때는 중공군 과소 평가하여 중요한 전쟁을 그르치는 실수도 범한다.
미군은 마닐라를 비무장 도시로 선언하고 1941년 12월24일 바탄반도로 철수를 시작한다.
1942년 1월2일 일본은 마닐라를 점령하고 바탄으로 향한다.
일본군 주력부대 48사단을 여기서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차출한다. 16사단과 타이완에서 증원된 65여단으로 바탄을 공격한다. 1차 저지선은 돌파하나 2차 저지선을 뚫지 못해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진다.
미군은 바탄에 43000 명이 6개월 정도 버티는 물자를 가지고 있었으나 실제 바탄에 있는 병력은 8만명에 피난민 까지 거의 10만이 있었다. 일본군 증원 부대가 도착하고 결국 1942년 4월 9일 미군은 항복한다.
1907년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육전조약 부속 규칙에 포로를 인간적으로 대우할 것을 명시한다.
전쟁포로의 인권을 지켜주던 시기였다. 일본은 바탄 점령후 미군과 필리핀군 75000 여명을 포로로 잡는다.
포로들을 북쪽 110km 떨어진 오도넬 포로 수용소로 데리고 간다. 물론 걸어서 간다. 물도 식량도 부족한 상태였다.
가는 길에 낙오자가 생기고 일본군은 즉결 처형한다. 결국 포로 수용소에 도착해보니 거의 2만명이 죽고 나머지 군인도 거의 반 송장 상태로 수용소에 오게 된다.
일본군은 항복의 개념이 없다. 항복한 군인은 있을 수 없기에 인간 이하 취급을 해버린 것이다.
당시 이 만행의 주동자로 지목된 사람이 14군 사령관 혼마 마사하루 이다.
마사하루는 영국에서 일본 대사까지 한 엘리트이고 군대에 민주주의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마사하루는 필리핀 함락에 6개월 이상 걸렸다는 이유로 해임되고 1943년 전역한다.
마사하루는 전후 전범 재판 때 자기는 죽음의 행진을 몰랐다고 항변한다. 모르면 장땡이냐?
이 사례는 지휘관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논쟁을 벌일 때 주요 사례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