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엘 알라메인 전투가 벌어지고 1942년 11월초 북아프리카의 독일군은 이집트에서 튀니지로 철수한다.
처칠은 이 전투를 두고 [엘 알라메인 이전에 승리는 없었고 엘 알라메인 이후에는 패배가 없었다] 라고 회고한다.
1943년 2월2일에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 제6군이 소련에 항복한다 .
1943년 2월18일 독일 선전 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총력전 연설을 통해 독일 국민을 결집시키려 한다 .
1943년 7월에는 쿠르스크에서 독일이 소련과의 전차전을 참패한다. 그 해 9월에는 이탈리아까지 항복한다.
주축국 모두가 어려운 상황이였고 일본도 과달카날 전투 패배로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주축국과의 연합전선을 펼치기 점점 어려워지게 된다.
콰달카날에서 참패하자 일본육군은 핫토리 다쿠시로를 작전참모로 임명한다.
이 사람은 도조 히데키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였다.
그동안의 일본 육군은 해군의 팽창을 쫒아가 뒤를 바쳐주는 역할을 해왔다.
미국의 강펀치를 세게 맞고 일본은 가드를 올리고 수세적 입장을 취하기로 한다.
미국보다 약한 적인 중국과 영국을 상대로 중국전선과 버마전선에 집중하기로 한다.
영국과 중국을 굴복시킨 후 1945년에서 1946년정도에 미국에 대대적 반격을 하기로 계획을 짠다.
1943년 9월에는 절대국방선을 만들어 방어 진지를 공고히 하기로 한다.
일본은 버마전선 부터 태평양 까지 광범위한 영토를 커버해야했다.
일본으로서는 앞으로의 전쟁 수행을 위해 동남아의 자원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남아 통제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일본은 아시아를 서구 열강으로 부터 지켜낸다는 명분을 세운다.
1943년 11월5일 부터 6일 까지 도조 히데키는 대동아 회의를 개최한다. 여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점령지의 괴뢰정부 지도자들이였다. 조선의 대표단이었던 이광수, 최남선도 이 회의에 참석한다.
일본은 침략 후 통치 명분이 필요했다. 정식적인 외교관계처럼 보이나 실상은 일본외 아시아를 자신들의 힘으로 개화시키겠다는 야망이 깔려있었다.
일본 해군은 미드웨이와 과달카날 패전 후 함대결전은 피하고 방어선을 구축하고 미 태평양 함대를 안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트루크 환초를 기점으로 9개 항공 요격대를 설정하는 것이다. 일본 항모는 거의 박살난 상대였고 섬은 불침항모이므로 이를 적극 활용하는 전략이었다. 이를 Z작전이라고 일본 해군은 명한다. 일본은 러일전쟁 때 z 깃발을 달고 쓰시마 해전에 승리한 전력이 있었다. 마징가 Z도 여기서 나왔나 보다.
일본 육군이 제시한 절대 국방선에는 여러섬이 빠져 있었고 더군다나 트루크 환초가 거의 경계에 있어서 일본 해군으로써는 거점이 위험해진 상태였다.
일본 해군은 절대 국방선을 반대하나 어쩔 수 없이 어전회의에서 이를 수락하나 내부적으로는 z작전에 입각해서 전략을 짠다.
일본 해군은 남아있는 전력을 모아 항모기동부대와 기지항공대를 합쳐 1943년 7월 제1항공함대를 편성한다.
97식,99식 함상 폭격기도 텐잔과 스이세이로 세대 교체한다.
97식,99식은 엔진이 1000마력이였다. 독일에서 고출력 엔진을 들여와 새로운 함상전투기에 탑재한다. 이 엔진을 DB601 이라고 하는데 이를 라이선스 생산한다.
DB601은 수랭식 엔진이여서 공랭식보다 복잡했다. 독일은 석유액화기술로 인조석유로 항공유를 생산했으나 일본은 그 기술에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정밀 가공 기술도 부족하여 엔진이 재성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불량률도 높았다.
일본이 절대 국방선 결정 1달 전인 1943년 8월 퀘벡에서 루스벨트와 처칠이 만난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나왔던 호텔인 샤토 프롱트낙에서 비밀 회담을 갖는다.
스탈린도 초청하려했으나 그는 오지 않는다.
주요 내용은 2차 대전 후의 세계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였다.
일본,독일,이탈리아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기로 한다. 그 전까지는 조건부 항복이나 종전이였는데 다시는 파시스트 같은 군국주의가 뿌리 내리지 못하도록 무조건이라는 단서를 달기로 한다.
1943년 9월 3일 이탈리아가 항복하고 정전협정을 체결하고 향 후 평화협정으로 바꾸기로 한다.
이것은 후에 6.25전쟁의 정전협정의 모델이 된다.
1930년대에 핵분열 연구가 시작된다. 이 연구를 하던 과학자가 대부분 유태인이였다.
1930년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많은 과학자가 영국으로 건너간다. 그들은 핵분열 발견을 영국에 알린다. 위험성을 안 영국 정부는 1941년 8월 [튜브 앨로이] 프로젝트를 승인하고 원자탄을 만들려 한다.
원자탄 만들려면 돈이 엄청들었다. 영국은 나치와 전쟁하느라 버거웠고 막강한 생산력을 지닌 미국에 자신들의 앞선 기술을 전수해 주면 전쟁에 유리할 것이라 판단한다.
원자탄 기초기술,제트엔진,엔진용 공기압축,잠수함 탐지 소나기술,성형폭약 기술등 당시 첨단 기술을 미국에 넘긴다.
이렇게 기술을 넘겨받은 미국은 1942년 1월 루즈벨트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승인한다.
당시 퀘벡에서 회담을 한 이유는 캐나다에 핵무기 연료인 우라늄과 중수가 있었기 때문이였다. 지금은 감속재로 흑연과 중수가 사용되지만 당시는 중수가 유일한 감속재였다. 중수는 1리터에 200만원 정도로 비싸고 자연에 존재하는 중수소는 0.0156 퍼센트 밖에 안된다.
퀘벡회담에서 핵무기 사용 계획도 등장한다. 여기서 같은 유럽에는 핵무기 사용을 안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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