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타운은 프랑스어로 샤를의 도시라 불린다.
영국의 찰스 2세가 자신을 지지한 왕당파에게 식민지 땅을 하사한다.
이 땅이 찰스 2세를 기리며 이름을 찰스 타운으로 하게 된다.
1783년 찰스 타운은 찰스턴으로 지명이 변경된다.
독립전쟁 직전 찰스턴은 미국의 4대 도시에 든다.
남부의 교통의 요지이며 천혜의 항구였다.
이곳을 지키는 것은 미국으로써 중요했다.
1812~1815년 까지 미국과 영국이 전쟁을 한다.
이 때 영국군은 강력한 해군 함대를 이끌고 미국 연안을 봉쇄한다.
영국군은 미국 대서양 연안 도시를 초토화 한다.
포토맥강을 거슬러 올라가 백악관과 국회의사당을 불태운다.
미국은 이 때 충격으로 해안 방어를 더 강화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원래 미국은 1794년부터 해안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1812년 전쟁 당시 영국 해군 배가 너무 빨라 포가 빚 맞았다.
뭔가 더 필요했다.
찰스턴 들어오는 입구에 요새를 건설하기로 한다.
참고로 섬터요새는 우리말이 아니고 사람이름이다.
모래톱 위에 인공섬을 만들고 그 위에 요새를 건설 하기로 한다.
매립식 인공섬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 방식은 수심 20m 이내만 건설 가능하다.
인공섬 틀 제작을 제작하고 물을 퍼내는 펌프작업도 필요한 고난도 토목 기술이였다.
이 어려운 작업을 한 사람들이 공병들이였다.
1802년에 설럽된 웨스트포인트 미육군사관학교는 설립 목표가 공병장교 양성이였다.
남북전쟁 당시 미 대학 중 유일한 공과대학이였다.
미국이 공병을 중요시 한 것은 국가 건설과 영토 개척의 첨병이기 때문이다.
공병대가 앞장서 항구,철도,교량,수도,요새등을 만든다.
공병을 엔진니어 (Military Engineer)라 한다.
엔진니어가 원래 군용 기계(engine)를 다루는 인력이라는 뜻이였다.
1826년 섬터요새 건설 계획이 나온다.
1829년 공사가 시작된다.
원래 이 지역은 약간 모래땅이 있었다.
그 지역을 확장해 섬을 만드는 것이다.
갑자기 개발한다니까 소유권 주장하는 놈이 나타난다.
이걸로 소유권 분쟁이 일어나 공사가 지연된다.
이 사업은 원래 사우스캐롤라이나 주(state) 방위 사업이었다.
그러나 공사시작 예산이 바닥난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섬터 요새 소유권을 연방 정부에 양도한다.
1836년 미연방 육군에서 인수해서 공사한다.
허리케인 때문에 공사 중단되기도 한다.
우여곡절 끝에 남부가 연합 탈퇴 당시 90%정도 완공된다.
섬터 요새의 외벽에는 벽돌 수 700만개 정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전함과 포격전을 대비해 벽돌을 여러겹으로 쌓아 지은 철옹성이다.
이 요새가 오각형인 것은 각 면에 위치한 요새와 호응해서 적함을 포격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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