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드 스콧이라는 노예가 있었다.
군의관이 두번째 주인이어서 군의관을 따라 자유주에서 오랜 생활한다
자유주를 갈망한다
주인이 죽자 1846년 미망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1850년 1월 1심재판 결과 자유인으로 인정받는다.
판례 하나하나 엄청난 파장을 가진다.
이 소송은 노예 소유주들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었다.
군의관 아내 오빠가 항소를 한다.
결국 연방 대법원까지 재판이 간다
당시 대통령이 민주당 제임스 뷰캐넌이다
대법원장은 민주당이였다.
판결의 쟁점 북부에 지냈더라도 미주리 법에 따라 노예라는 것이다.
연방 대법원 판결(1857년 3월) 미국 시민이 아닌 아프리카 노예는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고 판결한다.
즉 노예는 애초에 재판 자체를 걸 수 없는 것이다.
자유를 중시하는 공화당의 기본 철학을 뒤흔든 판결이다.
당시 민주당은 크게 환호한다.
공화당은 지금 바꾸지 않으면 미국 정신이 다 날아간다 라고 생각한다.
공화당은 뭉친다
이 시기에 바로 에이브러햄 링컨이 떠오른다.
토론과 연설을 통해 정치적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드레드 스콧 판결이 날 때 대통령은 민주당의 제임스 뷰캐넌이였다.
드레드 스콧으로 투영된 노예 갈등이 점점 심각해 진다.
재판 후 군의관 아내가 재혼한다.
재혼으로 인해 드레드 스콧은 원래 첫째 주인한테로 돌아간다.
첫째 주인은 노예 해방론자 공화당원이였다.
재판 당시에도 이 가문이 소송비용도 지원했다
결국 주인이 그를 해방한다.
그는 자유민이 된 후 1년 후 1858년 결핵으로 사망한다.
이 시기에 이렇듯 정치적 사건이 끊이지 않는다.
이런 갈등이 가속화된 원인이 있는데 바로 교통과 통신의 발달이다.
소식이 이제는 사람들 사이에 빠르게 퍼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