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클린 피어스는 미 역사상 가장 미남인 대통령으로 알려져있다.
일부 역사가는 프랭클린 피어스가 남북전쟁 시작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프랭클린 피어스는 1804년 미국 뉴햄프셔에 출생한다.
아버지는 벤자민 피어스로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한다.
후에 뉴햄프셔에 정착 프랭클린 피어스를 낳는다
아버지는 자신이 교육을 못받아 아들에게 교육을 잘 시키려 노력한다.
그러나 프랭클린 피어스는 놀기 좋아했다.
대학에 들어가나 여기서도 논다. 술도 엄청 잘마신다.
어찌저찌해서 변호사가 되고 1829년 24세에 뉴햄프셔 주 의회 의원으로 정치인생을 시작한다.
1833년에는 뉴햄프셔 하원의원이 된다.
이 사람의 정치적 무기는 사람 얼굴과 이름을 천재적으로 외운다는 것이다.
유쾌하고 쾌활했다.
정치 활동에 중요한 것이 인간적 매력이다.
인싸 수준이였다.
노동자는 술을 하루 피로 풀려고 먹고 상류계층은 정치적 수단으로 술을 이용한다.
프랭클린 피어스는 역사상 가장 많은 술을 마신 대통령이다.
폭탄주의 시작은 미국이다.
보일러 메이커는 위스키와 맥주를 섞은 것으로 생산노동자들이 즐겨 먹는다.
프랭클린 피어스는 노예폐지론자의 과격성을 두고 정치가 아닌 난동이라고 표현한다.
아버지 세대가 이룬 미국을 망치고 있다며 경멸한다.
1836년 최연소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된다.
프랭클린 피어스는 민주당이였다.
그가 속한 민주당이 선거에 패한다.
정치 시작 후 승승장구하던 그는 소수당은 처음 겪게되고 그냥 정치를 때려친다.
가족들은 프랭클린 피어스 정치 활동을 말렸다.
술을 너무 좋아해서 그렇다고 한다.
이런 염려로 뉴햄프셔주 금주 협회 회장을 맡기도 한다.
1846년 미국 멕시코 전쟁이 발발 하자 황당하게도 군인이 멋있다며 입대한다.
당시 미대통령은 제임스 K. 포크였는데 피어스는 그와 친했다.
정치적 영향으로 고속승진하고 2000명을 지휘하는 여단장이 된다.
멕시코 시티를 치러 베라크루즈 항구 상륙작전을 감행할 때 피어스는 함께하지 못한다.
술 파티 하느라 윈필드 스콧 장군 출정할 때 출정하지 못한다.
베라크루즈 도착했을 때는 스콧은 이미 멕시코 시티로 떠나있었다.
서둘러 출발하나 중간에 멕시코 산적도 만나고 우여곡절 끝에 3주만에 스콧 부대에 합류한다.
이 사람의 황당한 군생활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1847년 8월 19일 부터 20일 까지 벌어진 콘트레라스 전투가 벌어진다.
말에서 자빠진 그는 기절한다
기절한 후 일어나니 전투는 끝난다.
차폴테펙요새 전투 때는 설사로 빠진다.
언론은 그를 Faint Frank (졸도한 프랭크)라 조롱한다.
프랭클린 피어스는 술로써 사람들과 어울려 이런 조롱을 피한다.
그리고 뉴햄프셔로 돌아와 정계진출 기회를 엿본다.
1850년 타협안 여파로 휘그당이 분열된다.
1852년 후보가 난립했던 민주당 전당대회 열린다.
이 시기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따놓은 당상으로 그냥 대통령으로 될 수 있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 뉴햄프셔 대표 리바이 우드버리가 갑자기 사망한다.
얼굴에 말빨에 운빨에 천운을 타고난 사람이다.
이렇게 되자 프랭클린 피어스가 뉴햄프셔 대표가 된다.
그는 아내 몰래 이 일을 진행시킨다.
결국 신선한 인물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기로 하고 프랭클린 피어스가 대통령 후보가 된다.
그는 당시에 노예제도 견해를 공식적으로 밝힌적이 없었다.
게다가 잘생긴 외모 원만한 인간관계등으로 후한 점수를 받는다.
그는 아내에게 정치 안한다고 맹세한 적이 있었다.
대통령 후보 발표 전에 함께 가족들을 데리고 보스턴 여행을 간다.
피어스 없이 피어스가 대통령 후보가 된다.
대통령 취임 직전 가족 여행 중 열차 전복 사고로 피어스 부부는 살지만 11살 아들이 죽는다.
세 아들 중 두 아이 먼저 잃고 유일하게 남은 자식이 하늘나라로 간다.
아내는 대통령 당선에 대한 벌이라며 대통령 임기 초기 2년 동안 공식 행사에 참석 안한다.
여기서 운빨이 다한 걸까?
미국 남북 전쟁의 불씨가되는 캔자스 충돌이 이 대통령 시절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