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설립된 랭글리 공군기지에는 당시 미육군항공대 전술학교(ACTS)가 있었다.
항공전술을 가르키는 핵심 브레인 양성소이다.
윌리엄 렌드럼 미첼은 미공군력 선구자로 정밀폭격이론의 아버지이다.
그는 1926년 불명예 전역한다. 그 이유가 군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다.
군에서 시연및 홍보 비행이던 항공기가 추락한다.
그는 군수뇌부가 무리하게 행사를 강행했다며 정면으로 비판한다.
미첼은 당시 인지도가 있었는데 이 비난에 군수뇌부는 그를 군법회의에 회부한다.
여기서 13인의 판사가 있었는데 미첼의 친구였던 더글라스 맥아더도 있었다.
재판 증인으로 미육군항공대 후배들이 미첼에게 유리하게 증언했다는 이유로 그들도 한직으로 좌천된다.
그러나 미첼의 사상은 후배들에게 계승된다.
엘리트 미 육군항공대 장교는 결집하여 폭격기 마피아(깡패 아님)를 결성한다.
교관들은 조종사들에게 정밀폭격이론을 강조했다.
산업그물이론으로 모든 산업은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적의 산업시설의 급소만 노리는 것이다.
정밀 폭격하면 연결된 생산과정 모두 마비되게 된다.
적국은 생산을 하지 못해 결국 전쟁 수행을 할 수 없게 된다.
루즈벨트는 1939년 9월 2차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영국,독일에 호소문을 발표한다.
민간인 구역은 절대 폭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헨리 아놀드와 아이라 C 이커는 [날개 달린 전쟁]을 출간한다.
여기서 민간인에 대한 직접 타격은 현명하지 못한 방법이라고 기술한다.
미 8공군 사령관 칼 스파츠는 영국 폭격 사령부로부터 독일 지역 폭격 참여를 권유받으나 단칼에 거절한다.
1943년 후임으로 아이라 C 이커가 미 8공군 사령관이 되어 영국으로 간다.
그 역시 전임자와 같은 생각이였다.
이들 인물들은 지역폭격보다 정밀폭격이 군사 효용성이 경제적으로 높다고 판단한다.
커티스 르메이는 미전략폭격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르메이는 폭격기 마피아 교육을 받은 전술학교 출신으로 일중독자였다.
솔선수범하며 부하들을 압박해 부하들이 매우 피곤해했다.
르메이는 저돌적으로 상부 명령을 수행했다.
노든 조준기가 말썽이자 기상 좋은 날 골라서 폭격하고 전투상자대형도 고안한다.
폭격기에는 전투기를 요격하기위해 포탑이 많았다.
이 포탑을 이용 폭격기 끼리 화망을 구성해서 적기로 부터 격추당하지 않고 폭격하는 방법도 생각해낸다.
르메이는 1942년 11월 생나르제 유보트 기지를 폭격하러 간다.
제일 위험한 B-17 1번기에 탑승하여 정밀폭격을 지휘한다.
이 폭격때 단 한대의 폭격기도 격추당하지 않고 폭격 정밀도도 2배 이상 올라갔다.
르메이가 고안한 전투상자대형은 한동안 통했다.
독일은 이 대형을 공략하는 법을 알아낸다.
끝에서 부터 야금야금 공략하고 전투기들을 섹션별 대기 시켜 순차적으로 공격해 이 대형을 깨뜨린다.
공대공 로켓탄을 전투상자대형에 발사하고 전열이 흐트러질때 이 순간 폭격기를 공격했다.
르메이는 1943년 9월에 37세 나이에 별을 달아 준장이 된다.
후에 르메이는 일본을 폭격하는 지휘자로 성공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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