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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다방/독소전쟁

스몰렌스크 전투,스탈린 아들

by senamu 2026.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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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중부집단군은 브레스트 요새를 보병에게 맡기고 기갑부대는 그대로 진격하게 된다.파죽지세로 들어오는 독일의 기세를 막아야 했다.서부전선 사령관 파블로프는 독일군에게 반격을 가하려 했으나 독일 공군의 폭격과 부대간의 협조 실패로 위기에 몰리게 된다.독일군 47차량화 군단이 깊숙히 치고 들어오자 파블로프는 슈차라강 뒤로 철수를 명하게 된다.이 철수로 남쪽 전선 마저 뚫린다.철수 과정에서도 뒤통수에 대고 독일은 공격을 가하면서 전력은 약화되게 된다.1941년 6월 27일 독일군은 민스크로 양팔을 잡으면서 소련군을 포위하게 된다.다행인 것은 포위망 형성 전에 많은 병력이 빠져나간 것이였다.파블로프는 패전의 책임으로 처형되고 사령관은 교체된다.

독일은 이때 까지만 해도 전체 손실의 5%가 브레스트 요새에서 발생할 정도로 피해가 경미했다.소련은 민스크를 뺏기자 스몰렌스크 는 내 줄 수 없다며 앞쪽으로 대규모 전차와 보병으로 반격 준비를 하게 된다.1941년 7월 6일 소련은 1500여대의 전차로 독일군에게 공격을 가한다.독일은 무전기로 전차끼리 협력하며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소련 전차를 상대로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하게 된다.소련 전차들은 따로 놀면서 각개격파 당하고 독일 공군 까지 소련 지상군을 치면서 소련 전차 800여대가 깨지게 된다.스몰렌스크 가는 길이 열리게 된다.

독일 호트와 구데리안은 주력이 깨졌다며 신나게 스몰렌스크로 돌진하게 된다.소련군은 양쪽으로 치고 들어오는 독일군을 막기 위해 1941년 7월 13일 북쪽과 남쪽에서 양팔 저지에 나서게 된다.소련의 저항은 다시 수포로 돌아가고 독일 차량화 부대는 더 동쪽으로 깊숙히 진격하게 된다.스몰렌스크에 입성하게 되고 시가전이 벌어지게 된다.2주동안 치열한 전투가 펼쳐지고 스몰렌스크 주변 소련군에게 포위 위기에도 불구하고 현 위치를 고수하라는 명이 떨어지게 된다.모스크바까지 350km 가 남자 구데리안은 물들어 올때 노젓자며 더 동쪽으로 진격하게 된다.

한참 돌진하고 있는데 히틀러는 총통 지령 33호를 발동한다.중부집단 기갑 부대에게 남쪽과 북쪽을 도우라는 명이였다.중부 집단군 사령관 보크는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며 괴로워하게 된다.모스크바를 목전에 두고 갑자기 남북으로 찢어지게 생기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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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부대가 일부가 빠지고 소련군을 가둔 포위망안에서 독일군은 소탕작전에 나서게 된다.양쪽 모두 전력이 증강되고 있었다.소련군은 예비대까지 투입하며 이 지역 사수에 사활을 걸게 된다.소련군이 증강되면서 소련군 역시 독일 진영 깊숙히 파고 들게 된다.이러면서 양쪽 모두에게 포위 섬멸 기회가 생기게 된다.바둑으로 치면 수상전 양상이였다.어느 쪽도 2집이 나지 않아 살았다고 볼 수 없었다.포위망을 형성 가두어서 집을 형성하는 쪽이 이기게 된다.집을 형성한 것은 독일이였다.소련군 18만명이 전사한다.상당수가 포로로 잡힌다.파블로프는 처형을 당했지만 티모센코는 자신이 독일군 진격을 어느 정도 저지해서 시간을 벌어주었다며 항변하고 목숨을 건지게 된다.독일군 역시 피해를 입고 모스크바로 향하는 칼날은 무뎌지고 있었다.8월 6일 소련은 다시 병력을 모아 공격을 가하고 이 부근 전투는 9월12일 까지 치루어 지게 된다.

스탈린에게는 2남1녀를 슬하에 두고 있었다.스탈린의 원래 주가시빌리였고 스탈린이라는 이름은 혁명활동 때 쓰던 이름이였다.1907년 스탈린과 스바니제 사이에서 아들이 생기는데 이 사람이 주가시빌리 야코프 였다.야코프는 엄마를 1살때 잃게 된다.아버지 스탈린은 혁명한답시고 아들 돌보는 일에 소흘했고 야코프는 친척 손에 길러지게 된다.1920년대에 아버지와 함께 사는데 스탈린은 아들에게 잔소리를 퍼부어 대며 감나와라 배나와라 하게 된다.아버지의 갈굼에 야코프는 1928년 권총자살을 시도하나 실패한다.스탈린은 자살도 제대로 못한다며 아들을 또 갈구게 된다.사이는 점점 나빠지게 된다.야코프는 이혼 경력이 2번이나 있고 유대인인 며느리를 데려오게 된다.스탈린이 싫어하는 조건을 모두 갖춘 여자였다.야코프는 자동차 엔진니어로 일하고 스탈린은 기계 만지지 말고 장교가 되라며 다시 아들의 인생에 개입하게 된다.

야코프는 포병학교에 들어가고 1941년 5월 9일 졸업을 하게 된다.졸업과 동시에 포병 대위가 되고 얼마후 독소전이 터지게 된다.야코프는 서먹한 아버지 스탈린에 전화를 걸어 자신이 전장에 간다는 소식을 전하게 된다.스탈린은 잘 싸우고 돌아오라며 격려하게 된다.야코프의 상관인 코네프는 스탈린에게 아들을 후방으로 보내는 것이 어떠냐고 건의하게 된다.스탈린은 그대로 두라고 명하게 된다.야코프는 스몰렌스크 전투에 투입되고 포로가 된다.스탈린 아들이 잡혔다는 소식은 대서특필되고 괴벨스 귀에도 들어가게 된다.괴벨스는 야코프에게 독일편에 서서 라디오 방송한번 해주면 특혜를 주겠다며 회유하나 야코프는 거절하고 수용소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수용소에 소련 포로들의 생존률은 57%였다.영국및 미국 포로는 생존률이 98%였다.여기에는 슬라브인에 대한 멸시와 감당안되게 쏟아지는 포로 수에 있었다.야코프는 수용소에서 개고생을 하게 된다.

1943년 소련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승리하고 여기서 독일군 원수 파울루스를 생포하게 된다.히틀러는 파울루스에게 자결하라 명하지만 파울루스는 자신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며 자살을 거부한다.히틀러는 내 명령을 거부한다며 격분하게 된다.파울루스를 처형하기 위해 독일은 소련에 밀사를 보내 파울루스와 야코프를 바꾸자고 한다.스탈린은 이를 거부한다.냉정하게 쳐냈으나 스탈린은 측근들에게는 내가 필부였다면 이런 결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후회했다고 전해진다.이는 훗날 스탈린 딸의 회고록에서 나온 얘기라고 한다.야코프는 1944년 4월 14일 무엇에 홀린듯 전기철책선으로 가게 되고 포로를 감시하던 독일군이 이를 저지하게 된다.총살인지 감전사인지 모르나 독일군 공식 기록에는 감전사로 남게 된다.여기에 대해 왜 야코프가 이런 행동을 했나 여러 설이 있다.영국군 포로와 갈등설,오랜 포로 생활의 염증,스탈린의 카틴숲 학살이 밝혀지자 여기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살했다는 여러 추즉이 난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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