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필리핀을 통치할 때 화폐를 바꾼다.
필리핀 경제를 혼란에 빠뜨린다.
미국이 필리핀을 통치할 때는 사탕수수를 수확했는데 일본 입장에서는 별 필요없는 작물이였다.
일본은 대체작물로 대두와 면화로 바꿀 것을 강요한다.
농사는 망치고 민심은 돌아선다.
포로정책도 실패한다.
농민과 포로들은 게릴라가 되고 일본의 골칫거리가 된다.
1944년 7월 중순 육해군 합동연구를 실시한다.
내용은 미국이 1944후반에 침공할 것을 예측하고 육해군 합동으로 모든 전력을 동원해 미군을 격멸한다는 것이다.
작전명은 [쇼] 였고 뜻은 승리였다. 핵심은 필리핀 사수였다.
1944년 8월 10일 마닐라에서는 일본 해군 수뇌부 회의가 열린다.
연합함대 참모장 가미 시게노리는 적 수송선을 격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함대 참모장 고야나기 토미지는 여전히 함대 결전을 주장한다.
일본 해군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함대간 결전으로 큰 재미를 보았다.
그 사상에 해군은 얽매여 있었다.
시대는 변했고 해전은 항공기,함선등 입체 작전이 중요시되는 전쟁으로 가고 있었다.
일본 육군은 미 수송선단 공격을 해군에 제안하고 해군은 육군이 도와주면 함대결전을 하겠다는 입장이였다.
항공 전력 운영 주체를 놓고도 대립한다.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말레이 작전 성공 후 그의 전과를 시기한 도조와의 갈등으로 좌천된다.
관동군 제1방면군 사령관이 된다.
일왕에 대한 충성심이 강해 자신의 집무실 책상을 동경을 향해 배치한다.
도조가 실각하자 야마시타는 1944년 9월 26일 필리핀 제14방면군 사령관이 된다.
야마시타는 대만항공전이 과장되었다고 봤다.
육군 중심으로 필리핀을 방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대한 병력을 아껴 루손섬을 방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리핀 상륙을 위해 미국은 주요 거점을 폭격하고 등대를 확보한다.
레이테섬 상륙지점 정찰등 대규모 병력 상륙을 위한 준비를 한다.
1944년 10월 17일 일본은 필리핀 상륙이 임박했음을 알고 오전 7시에 경보를 발동한다.
항공기를 많이 잃은데다가 유류를 준비도 해야되는데 얼추 준비 완료 시간은 10월 25일로 예상한다.
일본이 준비도 되기전인 1944년 10월 20일 오전 6시부터 10시까지 레이테섬에 함포 공격을 실시한다.
함포 사격이 끝나자 월터 크루거 중장의 제6군이 상륙을 시작한다.
월터 크루커는 병사로 시작해서 대장까지 진급한 미역사상 최초의 병사 출신 장성이다.
제6군을 두 파트로 나누어 레이테섬 북쪽과 남쪽으로 상륙시킨다.
무려 20만명에 달하는 병력이다.
일본은 해안 방어 계획을 접었기 때문에 미군은 1시간만에 교두보를 확보한다.
1944년 10월 20일 오후 1시에 맥아더가 등장한다.
필리핀에서 철수한지 2년 7개월 만이다.
필리핀 망명정부 주요 인사와 함께 바닷길을 나란히 걸으며 극적인 사진을 연출한다.
맥아더는 이렇게 말한다. People of the Philippines I have returned
이와 비슷한 사진이 6.25전쟁 인천 상륙 작전에서도 연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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