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이 오키나와 상륙전 일본은 이미 오키나와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오키나와 학생들도 군으로 동원되었다.군에 동원된 학생들과 민간인들이 동굴에서 일본군과 함께 죽는다. 그 중 대표적 사건 2개가 있다.치비치리 동굴 사건이 일어난다.미군이 오키나와 상륙 후 다음날 오키나와 주민 140여명이 치비치리 동굴로 피신한다. 이 무리 중에 중국전선을 경험한 군인과 종군간호사가 있었다. 이들은 난징대학살을 경험한 자들이였다. 미군도 일본군이 중국인에게 했던 것처럼 잔인할 것이라며 자신의 경험담을 얘기한다. 이 들의 이야기를 들은 한 소녀가 자기 엄마에게 죽여달라고 한다. 이것이 번져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집단사가 발생한다. 89명 정도가 사망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12세 이하는 41명이나 되었다. 살아남은 50여명으로 인해 이 사건이 알려진다.시무쿠 동굴 사건도 일어난다. 치비치리 동굴 사건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시무쿠 동굴에 주민 1000여명이 피신해 있었다. 여기에는 미국 하와이에서 생활한 주민 2사람이 있었고 미군은 우리에게 잔인하지 않을 것이라며 주민들을 설득하고 여기 동굴 사람들은 모두 살아 남는다. 한 동굴은 잘못된 정보로 모두 죽고 한 동굴은 옳은 정보로 모두 산 것이다.일본군은 어린 소년들도 징집했으며 주민들을 포로로 만들지 않기 위해 직접 살해하는 만행도 저지른다.
1945년 6월 18일 미육군 10군 사령관 사이먼 B 버크너는 미해병 8연대가 싸우던 이토만 전투 시찰을 나간다.호위병도 없이 별 세개달린 짚차를 타고 헬멧도 장군을 인증하고 있었다. 서둘러 계급장없는 철모로 바꾸었지만 일본군은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일본군은 96식 곡사포 8발을 발사하고 그 중 한발이 관측소에 맞고 그 파편에 버크너가 맞고 전사하고 만다. 2차대전 기간 전사한 미군 지휘관 중 가장 계급이 높았다.버크너의 후임자로 미3상륙군단장 로이 가이거가 임명된다. 그는 버크너와 절친이였다. 원래 10군사령관은 조세프 스릴웰이 내정되있었다. 로이 가이거는 5일 동안 사령관을 맡는 임시직이였다.아직 일본의 잔존 세력이 남았지만 가이거는 임시직을 수행하는 동안 오키나와 가데나 공항에 성조기를 게양하여 오키나와 점령을 공식화한다. 오키나와 전투 승리의 공을 죽은 버크너에게 주고 싶은 것이였다.1945년 6월 22일 일본 육군 32군 사령관이 자결한다. 이로써 미군과 일본의 사령관이 모두 죽는 이례적인 일이 발생하게 된다. 미군은 6월 30일 일본군 잔적을 쓸어 버린다.로이 가이거는 해병대 파일럿 출신으로 1,2차대전 모두 네이비 크로스 훈장을 수여한 영웅이었다. 나중에 해병대가 독자적 항공대를 갖는데 기여하게 된다.
미군은 오키나와를 점령하자 군정을 실시한다. 이미 괌과 사이판은 군정을 실시하고 있었다.미군은 심리전을 위해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대량의 전단지를 살포했다.전단지에는 조선말로 된 것도 있었다. 내부분열과 미군에게 협조하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미군은 군정을 위해 장교들을 교육하고 양성했다.군정장교 임무는 다양했다. 전방에 배치되 민간인을 정찰하고 이들을 귀순시키기 위해 노력했다.후방에서는 피난민을 통제 관리하였다. 이런 노력 덕분에 피난민 수용소는 12개나 개설되었다. 거의 20만의 오키나와 민간인이 군정 통제하에 놓이게 된다. 사망자 10만을 제외하면 거의 2/3가량의 민간인이 미군 통치를 받는 것이였다.미군은 각 피난소마다 통역관을 두었는데 그 수가 부족해 통역관이 통치자와 민간인들 사이에 의견을 조율하면서 자연스레 권력이 생기게 되었다.
1970년 미국 닉슨 대통령과 일본 사토 에이사쿠 총리가 오키나와 반환을 합의한다. 이 때에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으로 궁핍한 시기였다. 그래서 나온 것이 해외 미군 감축이였다.이 때 논의 된 것은 우리와도 관련이 깊다. 닉슨은 주한 미군 완전 철수도 고려한 것이다. 그러면서 한반도 유사시 주일미군 파견 문제와 자위대 파견도 함께 논의된다. 아직도 당시 회담 내용은 비공개이다.우리나라는 이런 회담을 잘못 해석하여 오키나와 미군을 제주도로 들여오려고 한다.오키나와는 태평양에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미국은 1972년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하고 군사기지를 남긴다.1981년 오키나와에서 일본군이 주민을 살해한 내용을 삭제했다가 오키나와 주민들이 반발한다. 재판까지 이어지고 1997년에 일본 최고 재판소는 일본군 관여를 인정한다.2007년에 다시 한번 오키나와 주민 살해 내용을 삭제하는 시도가 있었다. 이 때에는 절묘하게 미군과 오키나와 주민간의 갈등이 대두된 시기였다. 주둔 미군의 범죄가 심각하자 주민들이 기지 반환 요구를 하고 대규모 시위로 이어진다.아직도 미군과 오키나와 주민간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고 그 불씨가 지금까지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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