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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다방/미국 남북 전쟁

리치먼드로 좀 빨리 가라

by senamu 2024.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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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이 빨리 좀 남부 수도 리치먼드로 진격하라고 맥클레런을 압박하지만 맥클레런은 너무 신중했다. 남군을 정찰하게 되고 남군이 북군을 속이기 위해 통나무를 대포인 척하고 기만작전을 펼친 것을 알게 된다. 존스턴군은 북군의 병력이 남군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눈치 까고 병력을 뒤로 뺀 것이다. 여론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 뭐하냐는 비난이 쏟아지게 된다. 맥클레런은 이 전쟁은 몇 년은 걸릴 것이라고 응수한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여론은 그를 굼벵이 맥이라며 다시 비난한다. 여론은 남부 스파이가 아니냐며 나중에 남부 영웅이 되어 대권을 넘보는 것이냐는 원색적인 비난도 가한다.

성화에 못 이긴 맥클레런은 수도에 45000여명의 방어 병력을 남기고 1862년 3월 1일 포토맥군 10만을 출항시킨다. 4월 2일 먼로요새에 상륙하게 된다. 남군은 발등에 불이 떨어지게 된다. 앞쪽을 지키고 있었는데 뒤통수로 맥클레런군이 들어온 것이다. 리치먼드가 위기에 놓이게 되고 존스턴군이 방어를 위해 이동해야 하는데 그 때까지 요크타운에 남아있는 병력이 맥클레런군을 막아야 했다. 맥클레런은 여기서 또 기다린다. 직접 공격보다 포위전을 한 것이다. 남군이 병력이 많은 것처럼 기만작전을 펼친 것도 있지만 그렇다하더라도 너무 신중했다. 시간은 흘러 한달이 지나간다. 링컨은 화가 치밀어 닥달하고 맥클레런은 그제서야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공격한다. 그러자 존스턴군은 북군의 김을 빼자며 1862년 5월 3일 리치먼드로 퇴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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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5월 5일 윌리엄스버그 전투가 벌어지고 맥클레런은 요크타운을 탈취한다. 답답한 링컨은 증기선을 타고 직접 맥클레런을 찾아간다. 이 사건은 미역사상 미대통령이 전투지역에 가장 가까이 간 사례이다.남군이 열세여서  확 밀어붙이면 되는데 남군이 생각보다 많다며 헛소리나 지껄이니 대통령은 울화통이 터지게 된다. 오히려 맥클레런은 자신의 기세에 존스턴군이 물러갔다며 자랑스러워한다. 뭔 헛소리냐며 따귀라도 날라고 싶었겠지만 링컨은 참는다. 둘은 이래저래 상극이였다.

맥클레런은 정찰 풍선을 띄워서 남군 상황을 다시 파악하고 남군의 철수를 확인한다. 치카호미니강 앞으로 병력을 이동시킨다. 이 지역은 남부 수도 리치먼드 시내가 육안으로 확인되는 지역이다. 남부는 개전이래 최대 위기를 맞게 된다. 이 시기가 1862년 5월 중후반이다. 병력도 북군에 비해 남군은 열세였다.

남부는 자원병으로 병력이 부족해지자 1862년 4월 16일 1차 징병법을 통과 시킨다. 이것이 미국 최초의 징병법이다. 전쟁 초기 남부인들은 자원병이 넘쳐났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되자 탈영병도 속출하고 자원병도 부족해지자 징집카드를 꺼낸 것이다. 나중에는 나이의 범위가 늘어나게 된다. 17세부터 50세까지가 징집대상이 된다. 남부의 철학적 가치는 개인과 주의 자유인데 징집이라는 것은 이 철학에 반대되는 것이였다. 국민 저항이 불보듯 뻔했다. 게다가 징집 제외 인원이 많았다.일단 노예는 안되고 각종 기술자,공무원,교사,약사등이 제외되었다.이렇게 빼면 군대 강제 징집되는 사람은 직접 농사짓는 백없는 백인 남성만 군에 입대하게 된다. 군에 끌려간 남자들을 대신해 그 자리를 여성이 채운다. 영화 [콜드 마운틴] 에서 이런 상황이 여실히 묘사된다. 이에 반해 북부는 이민자를 계속 받고 있었고 기계 공업도 발달해서 모병에 남부에 비해 수월했다.남부는 이래저래 전쟁을 수행할 힘을 계속 잃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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