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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다방/태평양 전쟁

미국의 일본 폭격 시도

by senamu 2024.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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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미육군항공단이 창설된다. 

1941년 미육군항공단은 항공대로 확대되고 병력은 230만명 까지 불어난다.

운용항공기도 약 78000대나 보유하게 된다.
미육군 항공대 사령관 헨리 아놀드는 B-29 프로젝트에 집착한다. 

원래 다른 폭격기도 있었지만 헨리 아놀드는 항속거리가 길어서 일본을 폭격할 수 있는 폭격기를 원한 것이다.

항속거리가 9000km 이기 때문에 일본 전역을 폭격할 수 있는 것이다.
1944년 4월에 B-29가 출시가 되고 전략공군도 신설된다. 

아놀드는 직접 미 육군항공대 제20공군 사령관도 겸임한다.
아놀드는 B-29를 온전히 일본 폭격에만 쓰고 싶어했다. 

그의 궁극의 목표는 일본 본토 폭격을 성공시켜 육군항공대를 독립시켜 공군을 만드는 것이다.

당시에는 공군이 없었고 육군에 예속되어 있었다.

이것은 동시에 폭격기 마피아의 꿈이기도 했다.

 

 

 

 

미20폭격기사령부는 인도 동부에 위치하게 된다.

 비교적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곳에 본부를 짓고 전진기지로 중국 청두를 지목한다.
중국 국민당 장제스는 35만명을 동원해 비행장을 건설한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B-29보급품을 날라야 하는데 중간에 히말라야 산맥이 있었다.

아직 일본 육군이 있어서 비행기를 이용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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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6월 5일 부터 B-29를 시험 출격시킨다.

 태국 방콕의 일본군 철도 폭격 후 만주,동남아로 폭격을 확대하나 폭격 정확도는 나빴다.
1944년 6월 15일 청두에서 일본 본토로 B-29가 첫 출격한다. 

목표는 큐슈에 있는 야하타제철소였다.
야하타제철소는 일본 압연 제품 24%나 생산하는 핵심 공장이였다. 

B-29 항속거리에도 들어오는 좋은 타겟이였다. 

이 제철소는 병합 후 신일본제철소가 되어 우리나라 포항제철과 경쟁하게 된다.
폭격으로 야하타제철소는 거의 피해를 입지않았고 민간인 256명만 사망한다. 

2개월동안 폭격을 시도하나 피해를 입히지 못한다.
1944년 8월 20일 커티스 르메이 가 20폭격기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한다. 

의욕적인 르메이가 왔으나 역시 폭격 성공률은 좋지 못했다.

 

 

 

1944년 7월 사이판이 함락되고 이 지역에 비행장을 건설한다. 

이 지역에서 B-29를 출동시키면 일본 본토 전역을 폭격할 수 있었다.
헤이우드 한셀이 사이판에 위치한 미21폭격기사령부 사령관이 된다.
한셀은 정밀폭격 신봉자로 일본 항공기 제작소를 폭격하기로 한다.
B-29집결이 늦어지고 도착한 B-29도 고장과 수리를 해야 했다. 

활주로도 미완성 상태였다.

 1944년 11월 24일 되서야 B-29가 첫출격한다.
첫출격 폭격기는 111대였는데 일부는 항로 이탈되고 연료부족으로 돌아오는 폭격기도 있었다. 

게다가 1대는 격추된다. 

폭격도 거센 바람에 실패한다. 

3일 후 다시 폭격 시도하나 구름이 너무 많아 또 실패한다. 

1944년 12월 13일 미쓰비시 중공업 나고야 항공제작소를 공격하러 간다. 

벌써 3번째 폭격이라 일본은 준비가 되어 있었다. 

31대가 피격당하고 4대가 격추당한다.
헤이우드 한셀은 거듭되는 실패에도 정밀 폭격을 고집한다. 

헨리 아놀드는 한셀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헨리 아놀드도 궁지에 몰린다. 

주변에서 B-29를 일본 본토 폭격에 쓰지 말고 다른데 쓰자며 맥아더와 해군에서 압박이 들어온다.

 니미츠 마저 B-29를 해군작전에 지원할 것을 제안한다.
헨리 아놀드는 이 때 심정을 대국민 연설을 통해 밝혔다.

 이 일로 스트레스를 받아 심장마비가 2번이나 오게 된다.

점점 정밀폭격의 입지가 좁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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