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한 방지책으로 중립국으로 구성된 감시기구를 만들기로 한다.중립국은 6.25전쟁에 직간접으로 참여하지 않은 국가여야 했다.공산 진영측은 소련을 중립국으로 내세우게 된다.명목상 참전 안했으므로 이런 주장이 나오게 된다.유엔측은 북한지역에 비행장을 건설하거나 복구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주장하게 된다.포로문제도 걸림돌이 된다.이게 중립국 구성과 포로문제 , 비행장 건설 문제등이 한 패키지로 묶이면서 양측은 답없는 줄다리기를 하게 된다.소련이 중립국이 아니라는 것은 미군도 파악하고 있었다.미그앨리 공중전등으로 소련 공군이 참전했음을 알게 된다.그렇다고 대놓고 반대하면 소련이 참전국이 되버려 확전이 될 수 도 있었다.공산진영은 외통수 카드를 들고 협상에 나선 것이다.공산진영은 북한 지역에 비행장 건설 못하게 하는 것은 지나친 내정간섭이라며 반대한다.







포로문제는 더 골치가 아팠다.포로문제는 곧 체제의 우월성이 누가 있느냐 자존심 싸움이였다.수차례 전투로 많은 포로가 발생했음에도 유엔군 포로와 공산진영 포로의 비율이 말도 안되게 나오게 된다.유엔측은 1:1 송환을 고집하게 된다.이렇게 되면 공산진영에서 부족한 분을 외국인 및 민간인 납북자로 채워야 했다.아니면 포로를 포기해야 했다.공산진영은 노예시장도 아니고 말도 안된다며 딴지를 걸게 된다.공산진영인 소련은 예전에도 제네바 합의를 지키지 않았다.상당수의 독일과 일본 포로들을 본국에 안보내고 강제노역 시킨 전례가 있었다.공산 진영 포로중에는 과거 국민당 정부군이나 한국군도 있어서 이들을 강제로 북한에 보낼 수는 없었다.공산진영은 잡힌 포로 전부를 보내라 주장한다.







포로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다 말다툼이 벌어지고 공산진영에 실언이 나온다.왜 유엔군 포로가 적냐고 따지자 붙잡힌 한국군 포로가 자진해서 북한군에 들어간다 하길래 입대시켰다는 논리를 펴게 된다.즉 포로에게 자유 선택을 줬다는 것이다.유엔은 이를 물고 늘어져 포로들에게 송환의사를 물어서 선택의 기회를 주는 방식을 취하게 된다.여기서 비극이 나오게 된다.포로들 간에도 진영 다툼이 벌어지게 된다.공산진영은 간첩을 풀어 공산진영의 체제가 얼마나 우월한가를 선동하게 된다.포로 수용소는 여러개 있었는데 어떤 곳은 공산진영 비율이 높아 자유주의를 선택하는 포로들을 집단 린치하는 일도 벌어지게 된다.











1952년 5월 7일 대형 사건이 터진다.거제 포로 수용소장 도드 준장이 납치된 것이다.이 시기는 리지웨이에서 클라크로 유엔군 사령관이 교체되는 때였다.클라크는 도드 준장을 구하는 즉시 강경진압을 하고 포로들을 분리 수용하기로 한다.반공포로는 육지에 분산 수용하고 친공포로는 섬같은데 분산수용하게 된다.북한에 있는 포로들은 유엔군과 한국군으로 분리되어 차별을 받게 된다.여기에 있는 포로들은 공산진영에 포섭 공작을 받게 된다.한국군은 포로 명단에도 누락된다.누락된 포로 중 가장 유명한 분은 조창호 소위이다.현리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후 송환되지 못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한국땅을 밟게 된다.









최초 포로 인원 교환후 혈전이 계속 벌어지나 포로 숫자는 변함이 없게 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공산진영 포로13만 중 8만이 송환을 희망하게 된다.문제는 숫자가 아니게 된다.중국군 포로 같은 경우 송환 거부 비율이 70%나 되는 것이였다.북한 출신 포로가 70%가 조국으로 가고 싶다고 하는 마당에 중국만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그 이유는 중국군 포로중에 전에 국민당군이였던 사람이 많았던 탓이였다.이들은 만일 중국에 가면 포로로 붙잡혔다며 반동분자로 몰릴 것을 두려워 했다.마오쩌둥은 공산체제가 자유체제에 못하다는 결과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1952년 9월 4일 모스크바회의에서 이 문제가 거론된다.김일성은 포로 수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입장이였다.지금도 폭격으로 수많은 인민이 죽어나가는데 이리되어도 저리되어도 매한가지라 한다.중국군은 이런 포로 수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추계공세를 감행하려 한다.하지만 백마고지와 저격능선에서 전력을 잃으며 무산되고 만다.






유엔측이 1대1 포로 교환을 주장한 이유가 있었다.북한에 강제 납치된 한국사람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북한은 조직적으로 지식인과 기술인을 납치하게 된다.이 문제를 거론하자 북한은 피란민문제를 꺼내게 된다.유엔군이 철수하면서 자국민을 납치해 데려갔다는 논리를 펴게 된다.게다가 유엔측은 전단을 뿌려 민심을 흔들었다고 주장하게 된다.1950년 초에는 북한에 핵이 떨어질 수 있다며 불안감을 조성하는 삐라도 살포하게 된다.북한은 이를 근거로 자국민 50만을 돌려달라고 한다.




유엔측은 이 문제를 논의해봤자 상황만 꼬인다며 이를 후순위로 물리게 된다.하지만 한국인에게 이 문제는 매우 중요했다.회담장에서 납치라는 용어가 불필요한 다툼을 유발한다며 실향사민이라는 용어를 채용하게 된다.양쪽 진영에서 귀국을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보내주는 것이 그 골자였다.하지만 실제 귀향한 사례는 드물었다.1953년 12월 11일 실향사민귀향협조위원회를 구성했지만 그 효과는 미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