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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다방/태평양 전쟁

루손섬 상륙과 마닐라 시가전

by senamu 2024.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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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 일본군은 14방면군으로 25만명정도 있었다. 

이에 대항하는 미군은 제6군 19만3천여명이였다.
일본은 미육군 제6군이 상륙할 때 이를 방관한다. 

미군의 화력을 아는 일본군은 내륙 깊숙히 적을 끌어들여 최대한 시간을 버는 작전을 취한다.

 본토결전 준비시간을 벌어주기 위함이였다.
1945년 1월 야마시타는 루손섬 북부 산악지대에 쇼부집단(14만명),마닐라 북서지구 켐부집단(3만명),마닐라 북동지구(8만명)으로 나눈다.
1945년 1월9일 링가엔만으로 미군이 상륙하고 1월30일에는 미군 클라크 비행장을 탈환한다.
맥아더는 전에 자신이 바탄반도에서 저항했기때문에 일본도 이곳을 이용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미육군11군단으로 하여금 수빅만 신안토니오 상륙작전을 감행시켜 바탄반도를 봉쇄한다.
빠른 마닐라 점령을 위해 바탕가스와 코레히도르섬에 공수부대를 투입한다.

 

 

 

일본은 만주의 제2기갑사단을 필리핀으로 보낸다. 

상륙도중에 38기동부대와 미잠수함에 걸려 병력과 전차가 수장된다.

어찌어찌해서 3개 전차연대가 상륙한다.
전차 6,7,10연대와 기동보병 제2연대였다. 

전차는 200대,30여문 화포와 차량 1400여대,기계화 보병 6500명의 막강한 전력이였다.
미국의 주력전차는 M4셔먼으로 75mm M3 전차포를 탑재하고 있었다.
두 전차가 맞붙게 되고 전차전은 미국의 일방적 승리였다. 

당시 일본 전차병 수기를 보면 미군 전차는 공격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군 전차는 미군 전차포탄에 한 발만 맞아도 박살났다고 적혀 있다.
일본군은 전차180여대,차량 370여대,병력 2000명등을 잃어버린다. 

결국 일본이 잘하지 않는 전멸 판정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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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일단 미군 전차를 멈추기 위해 통나무를 궤도에 끼워넣어 정지시키는 방법을 쓴다. 

그러나 전차가 단독으로 가지는 않기 때문에 보병은 총알 받이가 되었다.
일단 미군 전차 정지시켜도 문제였다. 

보병이 곡괭이를 들고 해치를 연 후 수류탄을 안에 집어 넣거나 대전차 지뢰를 가지고 상대해야 했다.
미군은 이를 막기위해 전차포탑에 쇠못을 박고 대전차 지뢰 못붙이게 나무판자도 덧댄다.
일본 보병의 희생은 처참할 정도였다. 

일본군은 보병용 대전차 무기가 있었으나 본토 결정을 한다며 필리핀 전선에는 내주지 않는다.

어의가 없다. 전차를 향해 보병이 가미카제한 것과 똑같다.

 

 

 

맥아더는 미 6군의 진격속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빨리 마닐라를 함락시키기를 바랬다. 

맥아더가 공수부대 투입하면서까지 서두른다.

월터 크루거도 제1기병사단으로 하여금 재빨리 마닐라를 가라고 갈군다.

이 기병사단은 3일동안 110km를 진격한다.
야마시타는 마닐라를 포기하고 방어전을 하려했다.

일본해군육전대가 명령을 거부한다.

결국 마닐라에서 미육군과 일본해군육전대가 시가전을 벌인다.
2차대전동안 가장 큰 시가전이 일어난 곳을 꼽는다면 베를린,바르샤바,마닐라가 꼽힌다.

 1945년 2월3일 시작되 1945년 3월 5일 까지 이어진다.
이 기간동안 미군 1000여명이 전사하고 5500여명이 부상당한다.

 일본군은 16000여명이 전사한다. 

민간인은 최소 10만명에서 최대 24만명이 사망한다.
일본군 입장에서는 필리핀인들이 게릴라에 협조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다. 

많은 장소에서 민간인을 집단 학살했다. 

심지어 독일인도 공격하고 스페인 공관도 습격해 외교 단절도 초래한다.
종전 후 전범 재판 때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처형된다.

가장 큰 죄는 민간인 학살 방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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