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시타는 루손에서 결전을 준비하려했다.
육군남방사령관 데라우치 히사이치의 명령으로 레이테섬으로 병력을 보내게 된다.
레이테섬 증원 병력은 총 4만 5천 정도 되며 먼저 1944년 11월 1일 일본 육군 제 1사단이 상륙한다.
이어 16사단도 투입된다.
1사단은 근위사단과 더불어 일본 최정예 사단이다.
일본은 1944년 11월초까지 레이테섬의 제공권을 확보하고 있었다.
제4항공군 도미나가 교지의 활약 덕분이였다.
이 때문에 미군의 보급은 차질이 생긴다.
일본은 이미 1944년 5월에 만주 주둔 제2비행사단을 필리핀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이들은 육상 폭격에 능했다.
일본은 오르모크항으로 계속 병력과 물자를 투입하고 있었다.
미6군 사령관 월터 크루거는 1944년 11월 3일 오르모크를 북쪽방향과 남쪽방향으로 협공하는 계획을 세운다.
레이테섬은 가운데 큰 산맥이 있어서 기동로가 많지는 않았다.
북쪽에 위치해 있던 브레이크넥 능선(야마시타 라인)에서 일본육군1사단은 진을 치고 있었다.
미 육군 10군단 24사단은 위험에 처한다.
1기병사단과 협공도 했으나 실패한다.
보급도 필리핀 현지인이 직접 날라야 했고 습한 기후도 미군에게 문제였다.
미군은 병력을 더 투입한다.
미 77사단이 오르모크 상륙작전을 벌인다.
1944년 12월 14일 우여곡절 끝에 브레이크넥을 장악한다.
일본군은 더 이상 저항하지 모하고 후퇴한다.
레이테섬은 미군이 장악한다.
레이테섬은 제8군에게 넘기고 제6군은 마닐라가 있는 루손섬 상륙을 준비한다.
미 육군 6군 사령관 월터 크루거가 레이테섬 상륙작전을 지휘한다.
그는 독일에서 태어나서 여덟살에 미국으로 이민간다.
이 이유때문에 유럽전선이 아닌 태평양 전선으로 갔다는 소문도 있다.
소문이 아니라 사실일 것 같다. 자국민을 죽일 수는 없지 않은가?
맥아더는 그를 전술적으로 뛰어난 야전장군이라 칭찬하고 1943년 2월 미육군 6군 사령관에 임명한다.
후에 로널드 스팩터 교수는 그가 레이테섬 상륙후 바로 진격하지 않아서 일본에게 방어의 기회를 주었다며 비판한다.
태평양 전선에서의 보급은 유럽전선의 거의 2.5배 비용이 들었다.
정유시설이 부족했던 태평양 전쟁 초기에는 페르시아만에서 원유를 공수했다.
나중에는 멕시코만에서 필리핀으로 연료를 수송한다.
미3함대는 기동함대여서 엄청난 연료소비를 했다.
미군은 미 3함대 전용 보급함대를 따로 운영한다.
유조선 34척,호위함대11척,구축함35척으로 구성된 보급함대였다.
필리핀에서 전투를 벌일 때는 미국,하와이,호주에서 태평양 전진기지 그리고 다시 필리핀으로 릴레이 수송을 벌였다.
유럽전선과 태평양전선에 투입할 수송선이 부족해진다.
미 해사위원회는 [원거리 수송선 건조 프로젝트] 를 진행한다.
표준화된 수송선인 리버티선을 만든다.
짐은 10000톤을 적재할 수 있었다.
2차대전동안 총 2710척이나 생산한다.
미국에는 18개 조선소가 있었는데 1944년에는 평균 2일에 3척을 진수할 정도였다.

그 중 워싱턴주 벤쿠버에 위치한 벤쿠버 조선소는 어마어마한 함정을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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