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만주와 몽골을 안보의 생명선으로 여긴다.
1931년 일본군은 남만주 철도주식 회사의 선로를 폭파시킨다.
이시와라 간지라는 일본 장교가 상부 허락 없이 조선에 있던 일본군을 국경 넘어 만주로 진군시킨다.
명령위반으로 그는 처벌받아야 하지만 오히려 여론은 호의적이였고 만주사변 주동자들은 진급한다.
독일군은 현장 지휘관에게 작전을 책임지는 재량권이 있었다.
일본군은 독일군을 벤치마킹하는 과정에서 이것이 변질되어 독단을 용인하는 이상한 체계로 된다.
만주국로 인해 일본은 새로운 시장이 생기게 되고 경제 공황을 극복한다.
러일 전쟁 직후 일본 국민은 자국의 희생에 비해 얻어온 것이 적다고 생각한다.
[피의 대가] 로 배상금 요구하는 시위가 들불처럼 번져 갔고 계엄령 선포 까지 간다.
일본은 청일전쟁,러일전쟁,1차세계대전 까지 전쟁을 겪었지만 자국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전쟁할 때 마다 경기는 호황이었고 다른 나라에 피해를 주든지 말든지 이런 식의 논리가 점점 힘을 얻게 된다.
독일도 그렇지만 일본도 군부의 군국주의에 국민들의 지지가 있었다.
1930년대 초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가 계속된다.
앞서 언급했듯 전쟁으로 일본은 많은 이득을 보았다.
군을 지지하고 평화를 외치는 정치인들은 암살되는 사건이 잇달아 일어난다.
일본군에는 두 개의 파벌이 있었는데 통제파와 황도파였다.
황도파는 일왕을 중심으로 부패한 기득권을 몰아내자는 청년장교 중심이었다. 주요 구성원은 농촌 출신 야전 장교 였다. 통제파는 군부 중심으로 전쟁 준비에 매진하자는 주의였다. 주요 구성원은 육사 출신 엘리트 였다.
황도파는 1936년 2월 26일 쿠테타를 일으켜 정부 주요 요인을 암살한다.
황도파는 일왕이 이 쿠테타를 지지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일왕은 자신의 신하를 죽였다며 분노한다.
일왕은 쿠테타 진압을 명하고 주동세력은 자결하거나 체포되고 청년 장교 16명은 총살된다.
2.26 사건 실패 후 황도파는 일본을 떠나 만주 관동군으로 이동하게 된다.
만주에서 자신들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간 것이다. 만주는 점점 기회의 땅으로 여겨진다.
당시 식민지 였던 조선과 타이완 청년들도 기회의 땅인 만주로 많이 가게 된다.
2.26 사건 실패 후 통제파는 일본 내각을 장악한다.
[현역무관군부대신제 : 현역 중장,대장이 내각 일원인 육군대신,해군대신을 겸하게 되는 제도 이다.] 가 부활하게 된다. 이제 통제파를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은 사라지게 된다.
1937년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킨다. 이에 미국은 석유금수조치를 취한다.
중국은 땅도 크고 저항도 완강했다. 게다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로 계속해서 미국과 영국이 중국을 지원했다.
자원이 없는 일본은 벌여놓은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서라도 석유가 필요로 하게 된다.
일본의 눈에 점점 인도네시아에 있는 팔렘방 유전이 들어오게 된다.
1941년 주미일본대사와 코델 헐이 회담한다. 이 때 헐은 [헐노트]라는 최후 통첩을 던진다.
내용은 중국및 인도차이나 반도 철수 ,중국 대륙 이권 반납 등이었다.
일본은 이제 이득을 포기하냐 지키냐의 기로에 서게 된다.
러일전쟁 전 일본 해군은 영국산 카디프 무연탄을 50만톤 비축하였다.
좋은 연료가 전쟁의 승패를 가를 수도 있다는 것을 일본 해군은 알게 된다.
1921년 석탄,석유 확보를 위해 일본 해군 연탄제조소를 연료창으로 개편하고 자원 확보를 위해 노력한다.
빠르게 석유시대로 들어가는 세계에서 석탄액화기술에 주목하게 된다. 석탄 액화란 석탄을 석유로 바꾸는 기술을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오지 탄광도 사실은 당시 첨단 석탄액화공장 이였다.
그러나 석탄액화기술은 매우 효율이 낮아 일본 해군 목표치에 크게 못미치는 달성률 10% 정도의 생산성 밖에 내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해군이 이렇게 투자하는 이유는 향후 석유 수급이 위험할 수 있음을 대비하기 위함 이었다.
아래는 태평양 전쟁 우두머리 인물이다.
히로히토 일왕
1901년 4월 29일에 출생했고 1989년에 사망한다.
일본군 상징이자 최고 통수권자이다.
대본영(태평양 전쟁 총괄한 일왕 직속 기구)를 통해
전쟁상황을 논의한다.
태평양 전쟁 개시 사인도 일왕이 직접한다.
일본 패망 후 전범재판이 열리나 책임이 면제되어
기소 조차 되지 않는다.
고노에 후미마로
중일전쟁 개전 당시 총리로 태평양 전쟁 시스템을 만든다.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동아신질서]를 주장하고 해군 군축을 반대한다. 1당 독재체제를 구축한다.
태평양 전쟁에 반대했으나 뒤로는 전쟁 준비를 한다.
진주만 공습 50일 앞두고 총리직을 사임한다.
도조 히데키
태평양 전쟁에 처음에는 회의적이었다.
개전 초반 기세를 올리자 적극적으로 태평양 전쟁을 지휘한다.
1944년 총리,육군대신,참모총장을 겸임해 권력의 정점에 이른다.
태평양 전쟁의 총책임자로 교수형을 당한다.
일찍부터 일본해군은 미국을 가상 적으로 삼았다.
미국해군이 강하므로 일본은 [점감요격작전]이라는 대책을 수립한다.
잠수함으로 미국 군함을 조금씩 격침하면서 남양군도에 있는 일본의 항공기지및 항공모함 함재기를 이용해 미항공전력을 감소시키는 작전이다. 한마디로 미군 전력을 조금씩 갉아 먹는 것이다.
일본 최정예 함대의 야간 기습 공격으로 미해군 주력함을 격파하는 전략도 세운다.
미국과 어느 정도 해군력이 비슷해지면 이 때 모든 병력을 모아 미국 해군을 격파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운다.
1930년대 미국은 유럽의 허무한 전쟁에 다시는 개입하지 않는 다는 분위기 였다.
일본이 판단하기에는 자유주의 국가 미국에서 전쟁을 위해 힘을 결집 시키는 것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한다.
일본은 태평양에서 우위를 점한 후 종전 후 유리한 고지에서 미국과 협상하는 전략을 짜게 된다.
당시 독일이 유럽에서 승승장구하므로 태평양에 식민지를 가졌던 영국과 네덜런드가 정신이 없다는 것도 유리하게 작용한다. 여러 전쟁에서 승리하여 많은 이득과 이권을 가져갔던 일본으로써는 절호의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