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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세계사/AD_1800_2099

토머스 에디슨 2부

by senamu 2024.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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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을 맛본 에디슨은 전깃불에 관심을 가진다. 당시는 아크등을 썼는데 그 빛이 너무 밝아 좀 줄일 필요가 있었다. 반대로 가정에서는 가스등을 썼는데 너무 불이 약했다. 게다가 가스등에서 발생하는 연기도 문제였다. 뭔가 개선이 필요했다. 에디슨은 이를 개선한 백열등을 만들게 된다. 1879년 12월 28일 멘로파크에서 이를 시연한다. 원래 백열등은 이미 조지프 스완이 만들었다.그러나 그 수명이 오래 가지 못한다. 스완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전구 안을 진공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기술 부족으로 하지 못한다. 에디슨은 이 문제를 해결한다. 1200시간 이상 버티는 전구를 만든다.이 때 만든 전기 회사가 오늘날의 제너럴 일렉트릭의 모체가 된다.여기서 에디슨은 유명한 명언을 다시 하게 된다.

 "나는 실패하지 않는다 다만 작동하지 않는 1만가지 방법을 찾았을 뿐이다."

에디슨은 세계로 나가기를 시도한다. 파리 국제 전기 박람회에서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기를 선보인다.당시 유럽 발전기보다 4배정도 컸고 무게도 한 30톤 나간다. 덩치가 큰 만큼 대용량이여서 1200여개의 램프를 동시에 밝힐 수 있는 우수한 제품이였다. 다음 박람회인 런던 박람회에서는 전광판을 만들어 자신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킨다.에디슨은 더 나아가게 된다. 이젠 새로운 전기 시스템에 도전한다. 뉴욕에 전기 사업 본부를 설립한다. 결국 1882년 9월 4일 백열등을 이용하여 어두운 뉴욕을 환하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이 성공을 유심히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바로 J.P. 모건이다. 돈냄새를 맡은 모건은 에디슨과 함께 뉴욕을 넘어 전국에 이를 깔자며 판을 크게 벌인다.

 승승장구 할 것 같던 에디슨에게 라이벌이 등장한다. 바로 웨스팅하우스이다. 에디슨은 직류로 전기 시스템을 만들었고 웨스팅하우스는 교류를 민다. 교류는 원래 힘을 못 쓰다가 변압기가 나오자 그 위력이 나오게 된다. 직류보다 경제적이였다.에디슨도 이를 잘 알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미 투자한 돈이 너무 많았고 이걸 또 다 싹 갈아엎자니 사업도 어퍼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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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슨은 안되겠다 싶어 홍보전에 나선다. 교류의 위험성을 사람들에게 알리기로 한다. 호재가 생긴다. 뉴욕에 폭설이 내리면서 전신주가 무너지며 전선이 땅에 늘어졌는데 여기에 감전당한 사람이 많았던 것이였다. 사실 직류나 교류 모두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교류의 위험성만 부각되게 된다. 그러다가 알프레드 사우스윅이라는 사람이 나타난다. 그는 교수형이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하다가 우연히 감전으로 즉사한 사람을 보게 된다. 그는 무릎을 탁치고 전기로 사람을 죽여보자며 에디슨을 찾아간다. 에디슨은 거절하고 위험한 교류 전기 대가 웨스팅하우스에게 물어보라고 한다. 웨스팅하우스도 거절한다. 그러나 미국 여러 주에서 전기를 이용해 사형을 집행하는 것을 법으로 정해지고 에디슨이 여기 자문위원으로 참여하며 전기의자가 만들어 진다. 에디슨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교류 방식으로 사형 전기 의자를 만들고 자기 이름을 슬쩍 뺀다. 모든 오명은 웨스팅하우스로 넘긴다. 1890년 8월 전기의자로 첫 사형이 집행된다.즉사한다는 말과 달리 전기로 사람죽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 사형수는 즉사하지 않고 살타는 냄새를 맡으며 수 시간동안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가 사망한다.  사람들에게 교류가 위험하다는 것이 각인되게 된다.

교류가 사장될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영웅이 나타난다. 바로 니콜라 테슬라였다.테슬라는 교류 전동기도 만들고 교류를 발전하고 송전하고 변압하는 방법등에 많은 특허를 가지고 있었다.웨스팅하우스가 필요한 기술이였고 웨스팅하우스는 테슬라에게 손을 내민다.드디어 교류를 알릴 기회가 온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400주년 기념하는 박람회가 열린다. 여기에 전시회를 빛내 줄 전구 설치 사업에 입찰이 열린 것이다. 에디슨과 J.P.모건 한 팀 그리고 웨스팅하우스와 테슬라 한 팀 이렇게 입찰을 한다. 여기서 가격 경쟁으로 테슬라 측이 승리한다.테슬라는 조금이라도 값을 낮추기 위해 자신의 교류 특허권을 포기한다. 테슬라는 좋은 기술을 여러 사람이 누려야 한다는 전지구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전구에 공급하는 에너지원으로 교류가 채택된다.하지만 전구는 어쩔 수 없이 에디슨 전구를 사용해야 했는데 에디슨은 항의의 표시로 전구를 납품을 안한다. 웨스팅하우스는 할 수 없이 질 떨어진 유사 전구를 썼고 이 전구는 수명이 짧아 전시회 기간동안 20만개의 전구를 수시로 갈아 주었다고 한다. 세계 박람회 성공으로 교류는 직류를 KO 시키게 된다. 나이지리아 수력 발전소 시스템으로 교류가 채택되고 위험한 전기로 통했던 교류는 이제 사람들 사이에서 안전한 것으로 각인되게 된다.

에디슨이 전기시스템 싸움에 졌어도 그는 굴하지 않는다. 영화산업도 큰 족적을 남긴다. 영화 카메라를 만들고 필름도 개선한다.여기에 그치지 않고 영화 스튜디오도 만든다. 이렇게 되자 중소형의 작은 영화사들이 에디슨의 등살에 서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 이동으로 서부에 헐리우드가 탄생하게 된다.

에디슨은 전기차도 만든다. 1890년대 이미 영국에는 전기차 택시가 운행되고 있었다.1900년도에는 미국 자동차 1/3이 전기자동차였다.에디슨은 이 전기차 사업에 뛰어들고 핵심인 배터리 개발에 열을 올리고 한 번 충전으로 1000마일 정도를 달리는 배터리를 만들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변수가 생긴다. 헨리 포드가 튀어나온다. 1908년 헨리 포드는 저가의 가솔린 자동차를 출시한다. 포드는 그 전에 에디슨에게 이 가솔린 차 계획을 알려 주고 자문을 구한다. 에디슨은 good idea 라며 칭찬하고 여기에 용기를 얻은 포드는 가솔린 차를 만든다.헨리 포드와 에디슨은 서로 협력하기로 한다. 그러나 불운이 생긴다.에디슨 배터리 공장이 화재로 잿더미가 된다. 그리고 1차대전이 발발한다. 전쟁시에는 전기차보다 가솔린 차가 훨씬 효율적이였다. 게다가 유전이 발견되어 기름값이 매우 싸진다. 전기차는 내연기관 자동차에 밀려 역사 속에 사라진다.하지만 전기차를 개발하면서 에디슨은 또 명언을 남긴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에디슨의 꿈은 그가 죽은 후에 다시 시동이 걸린다. 환경문제가 대두되면서 전기차 시대가 다가 오는 것이다.에디슨의 발명품은 오늘날 우리가 일상을 누리는 모든 시스템에 영향을 주게 된다.에디슨이 가정도 내팽게 치고 잠까지 반납하며 보인 열정의 결과물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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