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3월 30일 미해군은 팔라우 대공습을 단행한다.
항공기 700대로 팔라우를 초토화 시키고 일본 연합 함대도 치명상을 입는다.
일본은 서둘러 핵심 참모들은 비행기를 타고 필리핀으로 탈출하려 한다.
당시에는 기상예측이 신통치 않았다.
가다가 폭풍우를 만나고 일본연합함대사령관이 탄 비행기는 추락하고 전원 사망한다.
참모장 탑승기도 불시착한다.
연합합대 참모장 후쿠도메 시게루는 살아남고 연합함대 사령장관 고가 미네이치는 사망한다.
일본군 부대와 10km 정도 떨어진 세부 인근에 구조를 기다린다. 그러나 필리핀 원주민이 이들을 잡아 해안으로 이동한다.
원주민들은 이들을 필리핀 게릴라 세력에게 넘긴다. 필리핀 게릴라들은 일본군에 저항하고 있었다.
필리핀이 항복한 곳은 루손섬의 미군 사령부였고 나머지 섬들은 항복하지 않았다.
이들은 비탄죽음의 행진 사건으로 일본군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부 미군은 이들과 합류 적극적으로 일본에 저항하고 있었다.
일본 해군 군령부는 필리핀 제14방면군에 서둘러 추락한 비행기를 찾으라는 지시를 내린다.
참모들도 중요했지만 그 비행기에는 각종 기밀도 있었다.
커싱 게릴라 부대에 참모들이 잡혀있었다.
제임스 M 커싱은 미극동군 공병대 중령이었다가 필리핀에서 게릴라 활동을 하고 있었다.
세부섬 일본군에게는 눈에 가시였다.
일본의 토벌 작전이 게시되고 커싱은 버티지 못하고 포로들을 서로 교환하기로 한다.
일본연합함대 후쿠도메 참모장일행은 1944년 4월 11일 오전 11시에 석방된다. 그는 바로 도쿄로 호출된다.
일본군은 포로가 될 수 없다며 참모장은 추궁당하고 궁지에 몰린다.
참모장은 나는 정규군에 포로가 된것이 아니라 반군에 납치된 것이라며 할복을 면한다.
일본 육군 훈령 제1호는 포로를 금한다고 되어 있다.
전원 와전옥쇄(기왓장처럼 헛되이 사느니 옥처럼 적에 맞써서 죽겠다) 하게 되어 있다.
문제는 기밀서류였다.
일본군은 현상금도 엄청 세게 걸어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커싱은 기밀서류를 손에 넣고 이를 미군에게 넘긴다.
미군은 미 잠수함 크러밸리를 급파하고 기밀서류를 손에 넣은 후 전속력으로 호주로 향한다.
호주 사령부가 있는 브리즈번으로 기밀서류가 전달되고 일본의 신Z작전의 전모를 파악하게 된다.
기밀서류 해독과 배포를 마친 후 미군은 기밀서류를 제자리에 갖다 놓고 일본은 그것을 손에 넣는다.
1944년초 도조 히데키는 위험을 감지한다.
B-29 가 실전배치 중이였고 해상은 봉쇄되고 있었다. 최소한의 피해로 종전을 모색하게 된다.
육상에서는 임팔작전과 중일전쟁 최후의 대공세인 대륙타동작전을 펼치고 해상에서는 마리아나 제도에서 함대 결전을 하기로 한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유리한 고지를 선점 후 미국과 협상하여 종전을 모색하려 한다.
당시 뉴기니를 휩쓸던 맥아더에 대한 대책은 없었다. 더군다나 을사건 발생으로 기밀까지 노출된다.
일본은 신Z작전을 아호작전으로 바꾸고 내용 변화없이 작전을 그대로 실행하기로 한다. 일본은 완전 외통수였다.
1944년 6월 11일 미군은 사이판 공격을 시작한다. 2일 넘게 1100대의 함재기로 공습했고 제공권을 확보한다.
13일~14일에는 함포 사격까지 가해 쑥대밭을 만든다.
일본도 사전에 사이판의 중요성을 알고 1944년 3월에 만주에 배치되었던 제9전차연대를 사이판에 배치하고 있었다.
1944년 6월 15일 미군은 사이판에 상륙을 개시한다. 3개 사단 7100여명이였다.
1944년 6월 16일 일본 제9전차연대 야간기습공격을 감행한다.
새벽이라서 공중지원을 부를 수 없어 보병이 전차를 맞써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만주는 벌판이었으나 사이판은 숲이였다. 길이 좁아 전차는 2열 종대로 왔다.
미국은 바주카포로 응사했는데 이 포를 맞자 일본 전차는 박살난다.
독일 전차였으면 말도 안되는 상황이였다.
일본 전차대대가 미군 보병에게 격파당하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한다.
후에 사이판 함락 후 일본은 기존의 전술을 수정한다. 해안선 방어에 치중하다 보니 미군 화력에 속수무책이였다.
해안선은 포기하고 적을 깊숙히 끌어들여 장기전을 펼치는 종심방어로 전술을 바꾼다.
이럴러면 요새화가 시급한데 일본에게는 시간이 없었고 교리를 바꾸어 현장에 적용까지는 쉽지 않았다.
사이판 상륙 공격의 총책임자는 미해병대 제5상륙군단장 홀랜드 스미스였다.
그는 공격시 육군을 중앙에 해병대를 쌍날개로 해 공격을 했다.
육군은 몸을 움츠렸다 적의 저항을 하나씩 제거하면서 천천히 이동했다.
반면 해병대는 빠르게 이동하면서 적을 제거하는 스타일이였다. 속도가 안맞았다. 이 차이로 미해병의 희생이 컸다.
홀랜드 스미스는 육군27보병사단장인 랄프 스미스를 작전 중에 해임한다.
미 태평양해역군 육군 사령관 로버트 리처드슨은 격노한다. 미해군과 육군의 감정싸움으로 번진다.
맥아더도 해군을 비난하고 언론에서는 홀랜드 스미스가 사이판에서도 도살자를 자처하고 있다며 비난한다.
남태평양 작은 섬과 달리 지상전이 펼쳐졌고 미군 만여명이 부상당하고 약 3400여명이 전사한다.
그 해 7월9일 사이판은 함락된다.
사이판 함락 후 육군참모총장 조셉 T 맥나니가 중재해 해군과 육군의 갈등은 봉합된다.
홀랜드 스미스는 육군 지휘를 배제하기로 한다.
전후 1948년에도 이 문제 때문에 육군과 해군은 또 싸운다.
사이판 상륙당시 일본 해군의 제1기동함대 사령관은 오자와 지사부로였다.
오자와 중장은 수뢰전대 출신으로 어뢰를 잘썼다. 그러던중 제1항공전대를 지휘하며 항모기동부대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진주만 공습당시 말라야 작전에서 말라야 해변을 클리어 시켰으며 인도양으로 진출해 실론섬 해전에서 영국동인도 함대를 두들긴 지휘관이다.
미드웨이 해전 때 이 사람이 책임자였으면 전황은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오자와 중장은 미드웨이해전을 복기하면서 작전이 중간에 샌 것을 의심한다.
오자와 중장은 사이판인근에 정찰을 엄청나게 늘리고 함대도 둘로 나눈다.
전위부대를 방패막으로 본대가 뒤따라 오면서 조심스럽게 함대를 운영한다.
미드웨이 해전과 다르게 일본에게 불침항모인 육지가 있었다.
1944년 6월 19일 일본이 예상한대로 사이판 서부 해역에 미 기동함대가 들어온다.
초계기가 이를 발견하자 오자와 중장은 재빨리 함재기를 출격시킨다.
함재기 출격 당시 원하던 대로 됬다며 일본 해군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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