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너서스 전투로 크게 한방 먹은 북부는 정신을 번쩍차리게 된다. 자원병의 복무기간을 3년으로 늘리고 50만명 소집 법안을 통과시킨다. 원래 링컨은 40만을 요구했으나 의회는 더 강하게 50만으로 늘린것이다.
매너서스 전투 후 1861년 7월 22일 북군은 새로운 야전 사령관을 워싱턴 D.C.로 호출한다.
새로운 사령관은 조지 맥클레런이였다. 당시 그는 30대의 젊은 소장이였다. 적극적으로 윗선에 자신의 능력을 직접 어필하였다 결국 그가 북군 책임자가 된 것이다. 매너서스 전투 후 술이나 퍼 마시면서 사기가 바닥인 거리의 군인들 부터 싹 청소한다. 부임하자마자 군기를 확립하기 시작한다.
맥클레런은 1840년 13세의 나이로 펜실베니아 대학교에 입학한다. 어려서부터 남달랐던 것이다.
15세 때는 미국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에 조기 입학하더니 공부도 잘해 59명중 2등으로 졸업한다.
1846년 공병장교에 임관하고 1857년 전역 후 오하이오&미시시피 철도에 입사한다. 여기에서 철도회사를 잘 경영했다고 전해진다. 맥클레런의 강점은 무엇보다 대중을 휘어잡는 연설을 잘했다. 나폴레옹식 연설을 벤치마킹했다.
연설 중 유명한 것을 한 번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여기에 분명히 위험이 도사리라고 있다고 믿는다.
나는 여기 서서 너희들과 그 위험을 함께 나누려고 한다.
나도 두렵다 하지만 우리의 강함에 맞설 수 없는 자격없는 적은 원하지 않는다.
너희는 그 적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맥클레런이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재입대하여 웨스트버지니아를 연방 잔류시키더니 이제 포토맥군사령관이 된 것이다. 연설도 잘하지만 그는 병사 처우에 매우 지대한 관심을 가진다. 잘먹이고 잘입히는 것을 잘했다고 한다.
병사들은 이런 그를 리틀 맥이라는 애칭까지 붙여주며 칭송한다.
자기 밑에는 잘했지만 맥클레런은 자기 상관은 뒷담화까기 일 쑤였다. 포토맥군 입지를 어느 정도 다지자 바로 자기 윗 상관인 윈필드 스콧을 뒷담화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한다. 결국 윈필드 스콧은 사임한다.
맥클레런의 이런 행보로 1861년 11월 포토맥군(북동버지니아군+워싱턴군+셰넌도어군) 총 사령관이 된다. 병력은 무려 17만명에 달했다. 총사령관도 겸임하게 된다. 림컨이 총사령관 겸임이 버겁지 않느냐 물었을 때 맥클레런은 자신있게 할 수 있다고 외친다.
군 총사령관이 되자 이제 대통령도 무시한다. 링컨은 빨리 남쪽으로 진격하여 남북전쟁을 끝내고 싶은데 그 때마다 공격이 어려운 이유들을 늘어 놓으며 링컨에게 반항한다. 링컨은 참는다. 어디보자며 지켜보는 것이다. 이 양반은 애처가였는데 전선에서 아내에게 편지를 많이 쓴다.거기에 링컨에 대한 생각을 읽을 수 있는 편지들이 있다. 편지내용은 링컨이 고릴라같다며 깔아뭉개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심지어 부하 앞에서도 깠다고 전해진다. 이런 링컨에 대한 맥클레런의 태도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한번은 링컨이 국무장관과 함께 맥클레런 집에 찾아간다. 보통 사람이면 빨리 달려가 대통령을 영접해야 하나 그는 링컨을 딱 보더니 자기 침실로 들어간다. 그리고 잠이 든다. 링컨은 화가났지만 맥클레런이 승리만 가져오면 그의 가랭이라도 기겠다며 참는다. 맥클레런 성향이 아래 것들에게는 관대하고 자기 위에 누가 있는 꼴을 못본다. 이럴러면 대통령 밖에 없다. 결국 나중에는 대선까지 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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