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7월 미군이 마리아나 제도를 점령한다.
일본은 이오지마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구리바야시 다다미치를 이오지마로 보낸다.
구리바야시는 도조 히데키가 직접 보낸 사람으로 미국 유학파 출신이였고 미국을 잘아는 지미파였다.
구리바야시는 이오지마 부임 후 섬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치치지마 라는 섬도 있었는데 이 지역보다는 비행장 건설이 용이한 이오지마 섬으로 미군이 상륙할 것이라 예상한다.
이 지역으로 병력을 집중시킨다.
미군 상륙은 용인하고 안 쪽 깊숙한 곳에서 막기로 하고 지하 갱도를 구축한다.
사이판이 함락되면서 사이판으로 갈 병력이 이오지마 쪽으로 온다.
전차 26연대와 보병 145연대 였다.
이로 인해 방어 병력이 20000여명으로 크게 늘어난다.
이 섬은 화산재 섬으로 갱도를 팔 때마다 유황가스가 나와서 작업이 매우 어려웠다.
물도 없어서 빗물로 생활해야 했다.
자재도 매우 부족했다.
해군은 비행장 짓는다며 따로 놀 때 해군을 잘 설득해서 해군의 자재와 육군의 병력을 바꾸는 딜도 진행한다.
구리바야시는 병사와 힘든 생활도 같이하면서 솔선수범을 했다.
그나마 미군쪽에서도 인정받는 장교 중 한 명이다.
미해군의 목표는 오키나와였다.
이오지마는 쉽게 정복할줄 알았다.
하지만 이오지마는 이미 요새화가 되어 있었다.
이오지마 상륙전 포격을 하는데 3일만 한다.
오키나와를 위해 포탄을 아낄 필요가 있었다.
미군은 이오지마를 공격할 때 1944년 6월 자료를 가지고 작전을 짰다.
그러나 일본군은 그 이 후에 이오지마에 전력을 많이 보강하고 있었다.
1945년 2월 19일 미 해병이 이오지마에 상륙한다.
상륙 후 내륙으로 미군이 들어가자 일본군은 집중 포격을 시작했다.
이 때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여 2420여명의 미군이 전사한다.
이오지마 전투는 굉장히 치열했다.
일본군과 미군 시체가 도처에 널렸고 훼손된 시체가 많아 군화로 구분할 정도였다.
1945년 3월 26일 미군은 이오지마를 점령한다.
전사자가 6821명 부상자가 21000여명 정도였다.
미군은 증원부대까지 6만정도가 투입됬는데 여기서 절반이나 병력 손실이 일어난 것이다.
미군이 이오지마를 공격하려했던 목적인 B-29호위는 사실 말이 안되었다.
B-29 보유수 1000여대에 호위기가 턱없이 부족했다.
더군다나 성능이 B-29가 호위기인 P-51보다 좋았다.
일본군은 이오지마에서 전투기를 발진시켜 7차례 마리아나 제도를 공습했다.
B-29를 약간 파괴하나 이마저도 1945년 1월 이 후 공습이 끊긴다.
일본군 전투기에 거의 무장도 떼고 방탄도 제거한 전투기로 B-29를 향해 공대공으로 가미카제하는 작전도 하나 그 효과는 미비했다.
1945년 3월 4일 미군 점령 지역 이오지마 남부 비행장으로 B-29가 비상착륙하는 일이 벌어진다.
미군은 이오지마 섬을 공격한 명분을 여기서 찾게 된다.
B-29가 비상착륙할 수 있는 지역으로 이오지마 희생을 정당화하려 한다.
이오지마에 비상착륙한 B-29 승무원 24000여명 정도를 구조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후에 역사학자 로버트 S 버렐은 이 수치가 비상착륙 뿐만 아니라 정상착륙도 수치에 포함하며 부풀려 졌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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