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해군은 1차대전 참전을 앞두고 민간업체에 어뢰 생산을 위탁한다.
블리스 컴퍼니에 마크8어뢰 6000개를 발주한다.
1918년 7월까지 겨우 400개를 납품하는데 그친다.
미국은 어뢰생산을 국가에서 하기로 한다.
1918년 뉴포트 해군기지 조선소에 해군 어뢰 기지 생산 공장을 설립한다.
미국은 신형어뢰를 만들기로 한다.
그러나 대공황을 거치면서 예산이 대폭 삭감된다.
이 상태에서 마크13 항공어뢰, 마크14 잠수함어뢰, 마크15 구축함어뢰를 개발해야 했다.
적은 예산으로 하다보니 어뢰 3종 메카니즘을 최대한 비슷하게 하고 부품도 공용화한다.
성능 테스트 할 돈이 없어서 테스트 없이 어뢰를 대량 생산한다.
1941년 12월 일본이 남방작전 수행할 때 필리핀 루손섬 링가예만으로 일본군 주력부대가 상륙한다.
미국은 잠수함으로 이들을 격파하려 한다.
어뢰가 명중이 되고도 배가 부서지지 않는 기현상이 발생한다.
1941년 12월 부터 1942년 2월 까지 미잠수함은 4척이 손실되고 겨우 일본 수송선 12척만 격침한다.
루즈벨트에게 어뢰 문제가 보고되고 루즈벨트는 담당자를 호출해서 직접 추궁한다.
담당자는 군최고통수권자에게 진땀을 흘린다.
어뢰는 일정한 심도(깊이)로 항진해야 한다.
그런데 어뢰가 세팅한 깊이보다 3m 정도 아래로 항진하는 현상이 발견된다.
어뢰를 개발할 때 연습용 어뢰를 사용했다.
폭약 대신 다른 것으로 대체해 시험을 했다.
어뢰를 항진 시킨 후 공기 부력으로 다시 떠오르게 해 건져서 다시 쓴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세팅된 어뢰는 무거운 실탄을 장착하자 가라앉은 것이다.
실전에서 800발이나 쏜 뒤 문제가 공론화된다.
미 상층부는 책임회피에 급급해 잠수함운용의 잘못으로 돌린다.
남서태평양 잠수함 사령관 찰스 A 록우드 는 1942년 6월 마크 14어뢰의 심도 테스트를 진행한다.
실제 테스트 해보니 어뢰가 가라앉는 현상을 발견한다.
응급조치로 수심을 0m로 세팅한 후 어뢰를 발사시키게 된다.
응급조치로 버티는 사이 기계장치 결함을 수정하게 된다.
1943년 미잠수함이 점점 늘어나면서 공격 기회가 늘어난다.
1943년 4월 초계중이던 가토급 잠수함 USS 튜니는 적함을 발견한다.
다이요 항모에 어뢰를 발사한다.
피해가 없자 표적을 바꿔가며 시도하나 모두 피해를 주지 못한다.
나중에 일본 해군 통신 내용을 감청한다.
어뢰가 일본함 50m 전에 폭발했음을 알게 된다.
멀리서 미리 터진 것이다.
독일은 1차 대전에 자기 감응 신관을 만들었다.
배는 쇠로 만들어져 주위에 자기장이 발생한다.
어뢰 효과를 극대화 하려면 어뢰를 배 밑바닥에 터트려 배를 띄운후 버블제트 효과로 배를 부러뜨리는 것이 가장 좋다.
미국은 독일이 만든 자기 감응 기능에 감탄하여 1920년에 개발된 마크6 신관에 자기 감응 기능을 탑재한다.
당시에는 잘몰랐다.
독일이 자기 감응 신관을 사용했던 곳과 미국이 사용했던 곳의 자기장이 달라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였다.
태평양 지역의 지구 자기장이 강했던 것이다.
니미츠는 충격신관만 쓰도록 지시하고 1943년 6월말부터 자기 감응 기능을 제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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