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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다방/제1차 세계대전

갈리폴리 전역 2부

by senamu 2025.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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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그리스를 갈리폴리 전역에 투입하려 한다.튀르키예와 그리스는 서로 앙숙이였다.그 역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이런 좋지 않은 감정이 있어서 그리스가 오스만제국을 격파하는데 나서리라 보았지만 실패한다.알력 다툼이 있었다.왕실은 독일 왕실과 사독지간이였다.군부는 독일 시스템을 도입해 독일파가 많았다.외료라인은 친영파였다.총리도 그 중 한사람이였는데 우리는 반도국가이고 해양이 중요하다며 영국을 돕자고 한다.아무래도 외교라인이나 상업쪽은 영국 색채가 강했다.둘 다 기싸움 하느라 그리스는 강제 중립이 된다.

영국은 오스만 내부 분열도 유도한다.오스만이 다민족이니까 그들에게 봉기를 유도하여 내부 혼란을 일으키려 한다.그 중에 세가 강한 곳이 쿠르드족이였다.쿠르드인은 한 때 살라딘(영화 킹덤 오브 헤븐 주인공)을 배출하는 등 나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민족이였다.이들 수가 거의 3천만~4천만이라서 봉기하면 오스만 입장에서는 난감할 수 밖에 없었다.갈리폴리 전선이 소강상태로 보이자 오스만은 이들을 강경 진압하게 된다.영국이 이들을 돕는다고 약속했으나 이는 지켜지지 않게 된다.러시아도 이들을 도울 수 없었다.결국 몇 천만의 인구를 가진 민족 중에 아직도 독립국가를 못 가진 민족으로 오늘날 까지 남게 된다.

연합군이 외교적 노력에 헛발질을 하자 이제 군사적 방법밖에 없었다.지중해 사령관은 대규모 병력 증파를 요청하게 된다.그리고 기존 전선에 밀어 넣어 보았자 소모전이 될 꺼니가 측면을 치는 방법을 생각한다.적진 깊숙한 사로스만에 가서 상륙작전을 펼쳐서 후방에서 오스만군을 치는 계획이였다.갈리폴리판 인천상륙작전이였다.처칠은 동의하지만 실무자인 드로백(지중해 해군 사령관)은 거기는 잠수함이 득실거려서 반대한다.계획을 바꿔 영국군은 수불리만으로 진격하기로 한다.그와 동시에 헬레스곶에 연합군도 일제히 공격하여 갈리폴리 허리를 절단하기로 한다.1915년 8월 6일 수불리만 상륙작전이 개시된다.야심차게 상륙하게 된다.하지만 여기에 무스타파 카말이 있었다.케말의 16,19사단이 상륙군과 안작군의 합동 공격을 막아내게 된다.아치바바도 마찬가지였다.오스만군은 엄청난 피해에도 분전하면서 연합군의 공세를 막아내게 된다.1915년 8월 29일 연합군은 공격을 포기하게 된다.

 

연합군에게 대형 사건이 터진다.잘싸우는 불가리아가 독일 쪽에 붙은 것이다.이렇게 되면 독일의 지원이 육로를 통해 오스만에게 갈 수 있었다.전달이 어려웠던 중포를 오스만에게 지원할 수 있는 길도 뚫린다.

발칸 전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불가리아와 그리스였다.불가리아가 독일에 붙자 그리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발작 버튼을 누른 것이였다.바로 그리스는 군 총동원령을 내리게 된다.영국과 프랑스도 놀라게 된다.이제 오스만이 중요한게 아니라 발칸반도가 독일에게 통째로 넘어가게 생기게 된 것이다.무게 중심은 테살로니카로 옮겨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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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은 이제 갈리폴리에서 발을 뺄 준비를 하게 된다.해밀턴을 해임하고 새 사령관으로 먼로를 앉힌다.1915년 12월 10일 부터 한달에 걸친 철수 계획을 세우게 된다.철수 작전을 굉장히 치밀하게 세우게 된다.잘못 퇴각했다가는 적에게 등을 보여 오스만에게 일격을 맞을 수 있던 것이였다.야간에 포격을 하면서 그 빈도수를 점점 줄이게 된다.오스만군은 그냥 그런가 보다 넘어가지만 연합군은 그 시기 조금씩 병력을 빼고 있었다.후송병을 실어가는 것처럼 병력을 빼기도 한다.병력이 비는 것을 들키면 안되니까 사람이 없어도 총을 쏘는 장치도 만든다.총 방아쇠에 물통을 달고 물이 차면 총알이 나가도록 한 것이다.크리켓도 대놓고 한다.적을 안심시키고 그날 밤 또 병력을 뺀다.이런 술책으로 수만의 연합군이 탈출하게 된다.

오스만군은 1916년 1월 7일 헬레스곳의 연합군을 공격한다.하지만 여기는 연합군이 꽤 있었다.연합군은 집중 포격으로 오스만의 공세를 막아내게 된다.한바탕 홍역을 치룬 오스만군은 공세를 멈추게 된다.그 후 이틀 동안 연합군은 헬레스곳을 비우고 철수하게 된다.

사실 갈리폴리에서 영국은 진작에 손을 뺏어야 했다.피해가 상당했다.영국이 쉽게 발을 빼지 못한 것은 위신문제가 있었다.여기서 손을 빼면 대영제국 체면에 먹칠을 하게 되는 것이였다.영국 식민지 중에는 이슬람 세력도 있었기 때문에 이거 손 빼는 것은 간단한 것이 아니였다.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였다.프랑스와 러시아의 따가운 시선이 있었다. 두 국가가 보기에 영국은 유럽의 대륙 전쟁에 피해는 거의 입지않고 전리품만 빼가는 양아치 국가로 보였다.이러다 보니 두 국가 눈치를 보면서 중동에서 뭔가 실리를 챙겨야 하는 입장이 되게 된다.결국 중동문제를 이들 국가와 논의하게 된다.영국,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는 드분젠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전후 오스만이 지배하고 있는 중동에 대해 의논하게 된다.여기서 영국의 마크 사이크스의 입김이 많은 영향을 미친다.결국 사이크스는 프랑스 피코와 중동 분할에 대해 분할 협정을 맺게 되고 이게 오늘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시작이 된다.

갈리폴리에서 연합군은 30만 오스만은 25만 정도가 나게 된다.연합군의 철수로 오스만이 갈리폴리 전역을 승리하게 된다.이들 양쪽은 당사자이지만 당사자가 아닌 영연방으로 참가한 안작군은 희생양이 된다.갈리폴리 반도에 안작코프라 붙여진 것은 그 유래가 안작군(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이였다.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지금도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이곳을 방문한다고 한다.무스타파 케말도 이들이 희생양이라는 잘 알고 있었다.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 머나먼 나라에 아들을 떠나 보낸 그대 어머니들 이시여 그대들의 아들들은 이제 우리 가슴에 안겨 평화로이 누워 있다오 그 아들들은 이제 이 땅에서 목숨을 잃은 뒤에 우리 아들도 되었다오] 

이 갈리폴리 전투로 영연방인 호주와 뉴질랜드는 영국에 대한 분노로 가득차게 된다.안작군은 거의 17~18세의 신병이 많았고 이들을 쉬운 곳이 아닌 완전히 사지로 몰아넣은 것이다.영연방이 가족이라며 다독였지만 이게 가족같은 관계에서 족같은 관계라는 사실을 지우기 어려웠다.영국은 이들을 다시 수습해 이 후 벌어질 참혹한 전투인 솜에 투입시켜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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