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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다방/태평양 전쟁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

by senamu 2024.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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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최고 전쟁지도회의가 개최된다.항복에는 동의하지만 계전파 세력은 조건을 단다. 전범재판을 일본이 하고 무장해제도 일본이 하고 연합국이 일본을 점령하면 안되고 소규모 병력을 유지시켜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조건을 건다.본격적 항복논의는 소련 참전 직후였다. 소련이 일본 점령하면 천황제가 유지 안될 것은 자명했다.공산주의가 천황을 남겨두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원자폭탄 맞아서 국민들 죽은 것보다 소련 참전을 더 두려워 한 것이다.내각회의에서도 결론이 나지않고 1945년 8월 9일 23시 50분에 어전회의가 열린다.어전회의에서도 계전파와 화평파가 대립하자 일본 총리 스즈키 간타로는 천황에게 주사위를 던진다. 천황은 천황의 법적 지위를 인정한다는 조건에 포츠담 회담 내용을 수용하기로 결정한다.일본이 항복의사를 전달하자 1945년 8월 12일 연합국은 응답문을 발송한다. 국민의 뜻에 따르는 정부를 구성하겠다는 것으로 천황제를 없애겠다는 답이였다.수뇌부의 이런 논의에 일부 육군성 장교들 중 일부가 반대하여 쿠테타를 일으키기로 한다. 육군대신을 찾아가 동참을 요구하나 거부한다.1945년 8월 14일 13시 에 어전회의가 소집되고 천황의 뜻인 성단을 작성하고 항복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8월 14일 23시 30분에 항복방송을 녹음한다.같은 시각 쿠테타 궁성사건이 일어난다. 이들의 목표는 항복 방송 녹음본을 찾아 없애는 것이였다. 1945년 8월 15일 새벽 5시에 일본 동부군이 투입되어 쿠테타를 진압하기 시작한다.녹음본 탈취를 실패하고 쿠테타 주모자는 대부분 자결한다.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 도 자결한다.

쿠테타가 실패하고 녹음본은 1945년 8월 15일 정오에 송출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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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서 시국을 수습하고자 충량한 그대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지(중국)·소 4개국에 그 공동 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하였다.
대체로 보아, 제국 신민의 강녕을 도모하고 만방 공영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고자 함은 
황조황종(皇祖皇宗)(열성조 즉 역대의 천황)의 유범으로서 짐은 이를 삼가 제쳐두지 않았다. 
일찍이 미영 2개국에 선전 포고를 한 까닭은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함과 같음은 본디 짐의 뜻이 아니었다.
그런데 교전한 지 이미 4년이 지나 짐의 육해군 장병의 용전(勇戰)(용감히 싸움), 
짐의 백관유사(百官有司)(조정의 많은 벼슬아치)의 여정(勵精)(성섬껏 노력), 
짐의 일억 중서(衆庶)(국민을 뜻함)의 봉공(奉公)(나라를 받듦) 등 각각 최선을 다했음에도, 
전국(戰局)(전쟁의 국면)이 호전된 것만은 아니었으며 세계의 대세 역시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적은 새로이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무고한 백성들을 거듭 살상하였으며 
그 참해(慘害)(참혹히 해침)가 미치는 바는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욱이 교전을 계속한다면 결국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뿐더러, 나아가서는 인류의 문명도 파각(破却)(멸망과 같은 의미)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짐은 무엇으로 억조(億兆)(억과 조,아주 많음)의 어린 백성을 보전하고 황조황종(皇祖皇宗)(열성조 즉 역대의 천황)의 신령에게 사죄할 수 있겠는가. 
짐이 제국 정부로 하여금 공동 선언에 응하도록 한 것도 이런 이유다.
짐은 제국과 함께 시종 동아의 해방에 협력한 제맹방(여러 동맹국)에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 신민으로서 전진(戰陣)(전쟁터)에서 죽고 직역(職域)(직무)에 순직했으며 비명(非命)에 스러진 자 및 그 유족을 생각하면 오장육부가 찢어진다. 
또한 전상(戰傷)을 입고 재화(災禍)를 입어 가업을 잃은 자들의 후생(厚生)(생계)에 이르러서는 짐이 깊이 진념하는 바이다.
생각건대 금후 제국이 받아야 할 고난은 무론(물론) 심상치 않고, 그대 신민의 충정도 짐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짐은 시운이 흘러가는 바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 이로써 만세(萬世)를 위해 태평한 세상을 열고자 한다.
이로써 짐은 국체(國體)를 호지(護持)(수호)하고, 그대 신민의 적성(赤誠)(참된 정성)을 믿고 의지하며 항상 그대 신민과 함께할 것이다.
만일 감정이 격해지는 바 함부로 사단을 일으키거나 동포끼리 서로 배척하여 시국을 어지럽게 함으로써 대도(大道)를 그르치고 세계에서 신의를 잃는다면 이는 짐이 가장 경계하는 일이다.
아무쪼록 거국일가(擧國一家) 자손이 서로 전하여 굳건히 신주(神州)(일본)의 불멸을 믿고, 
책임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는 것을 생각하여 장래의 건설에 총력을 기울여 도의(道義)를 두텁게 하고 
지조를 굳게 하여 맹세코 국체의 정화(精華)(물건의 깨끗하고 순수한 부분)를 발양하고
 세계의 진운(進運)(진보의 기운)에 뒤처지지 않도록 하라.그대 신민은 이러한 짐의 뜻을 명심하여 지키도록 하라.

 

내용은 침략 전쟁을 부인하고 자신이 평화주의자임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특히 원자 폭탄 투입을 언급하며 더 가다가는 인류의 파멸이 될 것이라며 자신이 직접 나서서 전쟁을 끝냈음을 강조한다. 천황의 결정으로 일본 국민을 구했다는 것도 강조한다.가미카제로 의미없는 죽음을 강요하며 많은 식민지 국가에 엄청난 피해를 끼치고 연합군 포로를 학대한 내용등 일본군국주의에 대한 사과는 전혀 없었다.일본 우익의 논리하고 많이 떨어지는 대목이다. 일본천황은 1988년 우리나라 서울 올림픽을 본 후 1989년 1월 7일에 천수를 누리고 사망한다.
역사가들은 일본이 항복을 한 이유가 원자 폭탄의 위력 보다는 소련의 침공에 더 무게를 둔다. 일본 군령부총장 도요다 소에무 는 미군에게 원자 폭탄이 많지 않을 것이라 예견해 이 주장에 더 힘이 실린다. 한 대 더 맞지 뭐 이런 식인 것이다.죽어가는 국민과 그 피해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은 것이다.일본 해군대신 요나이 미치마사 는 원자폭탄은 하늘이 도운 것이라며 항복의 명분을 줬다고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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