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맨해튼 프로젝트로 원자 폭탄을 개발을 시작하고 1944년 12월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할 부대를 만든다.제509복합비행전대로 이 부대는 유타주 웬도버 비행장에서 모의 폭탄으로 투하 훈련을 계속한다.맨해튼 프로젝트 감독기구 군사정책위원회의 윌리엄 R 퍼넬과 토마스 파렐은 1945년 르메이를 찾아가 신무기를 언급하며 티니안에 따로 비행장을 준비시킨다.1945년 5월 훈련을 마친 509복합비행전대는 티니안으로 이동한다.
1945년 4월 25일 헨리 스팀슨(미전쟁부장관) 과 레슬리 그로브스(맨하튼 프로젝트 책임자)는 트루먼에게 맨하튼 프로젝트를 대통령에게 첫 보고한다.대통령에게 숨길 정도로 맨하튼 프로젝트는 극비였다.1945년 4월 27일 표적위원회를 설립하고 일본 어디에 원자폭탄을 사용할지를 논의한다.폭탄은 2발 이상 투하하기로 결정한다. 처음은 위력을 보여주고 두번째는 우리가 원자폭탄이 또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표적의 조건은 인구가 많은 산업도시, 위력 발휘가 가능한 장소, 레이다로 산업시설이 선명한 곳, 심리적 효과가 최대인 곳 (즉 똑똑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원자폭탄이 이제 까지와의 폭탄과 차원이 다르다 라는 것을 알 수 있게) 이다.위 4개를 만족하는 도시는 교토였다.도쿄는 이미 폭격을 많이 맞았고 일왕이 사망할 경우 상징성 때문에 파장이 크다고 보았다. 미군은 도쿄 폭격시 이러한 점 때문에 일본 황궁을 직접 폭격하지 않는다.미육군항공대 사령관 헨리 아놀드와 그로브스가 교토 원자폭탄 투하를 찬성하자 스팀슨은 트루먼을 설득해 교토를 제외시킨다.1945년 트루먼과 스팀슨은 포츠담회담에 참석하는데 그로브스 보고서에 교토가 또 포함되자 전쟁부 장관 권한으로 즉각 취소시키고 교토 대신 나가사키를 넣는다.스팀슨이 왜 교토를 그토록 제외시키려 애썼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가 신혼여행을 교토로 다녀와서 그렇다는 설이 있고 일본의 정신적 수도이자 많은 문화재가 있는 교토를 아껴서 그렇다는 설도 있다.
표적위원회에 두 축 레슬리 그로브스와 헨리 스탐슨이 있었다. 그 중 레슬리 그로브스는 1914년 웨스트포인트 낙방후 메사추세츠 공과대학에 입학한다.다시 웨스트포인트에 도전해서 입학에 성공하고 공병장교로 임관된다.1941년 전쟁부(현국방부) 청사 건설 총책임자가 된다. 오늘날의 미 국방부 펜타곤을 빠른 시간에 완성한다. 안되면 되게하라는 정신을 가지고 목표를 위해 물불 안가리는 사람이다.이런 추진력으로 1942년 9월 중장 진급후 맨해튼 프로젝트 책임자로 임명된다. 괴팍한 물리학자들에게 당근과 채찍을 써가며 원자폭탄을 개발한다.
헨리 스탐스는 귀족 가문 출신이며 명문학교인 필립스 아카데미 앤도버를 나왔다.민주당및 공화당 누가 정권을 잡아도 항상 요직에 기용되었다.1906년 뉴욕 남부지방 검사였고 1911년에는 미 전쟁부 장관에 임명된다.1921년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주도적역할을 했으며 1929년부터 1933년까지 미 국무장관도 역임한다.2차대전 내내 미 전쟁부 장관으로 임무를 수행한다.미최고정책결정기구 SWNCC (state war navy 주,전쟁부,해군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SWNCC는 후에 SANACC(state army navy airforce 주-육-해-공군)으로 된다. 1948년에 이 기구가 미 국가안전보장회의(NSC)로 정착된다.일본이 진주만 공습하자 일본계 미국인 약 11만명을 강제 수용소로 이주시키는 계획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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