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는 일본과 중국의 영향을 받아 건축물 양식이 혼합되어있다.
원래 오키나와는 세나라로 쪼개져 있었다.
1429년 중산국 쇼하시왕이 삼산을 통일하고 류큐왕국(유구국)을 세운다.
동남아 무역의 중간지점으로 중계무역이 상당히 발달한다.
임진왜란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유구국에게 병력을 보내달라고 하나 유구국은 거절한다.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열고 1609년 사쓰마번에서 유구국을 침략한다.
유구국을 존속은 시키되 무역을 감독하며 간접지배한다.
일본은 근대 들어와서 오키나와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깨닫는다.
1872년 류큐왕국을 류큐번으로 바꾼다.
가장 중요한 것이 청에게 조공하지 말라는 것이다.
1876년 강화도 조약때에도 일본은 조선에게 청에게 조공하지 말라는 것을 1조에 명기한다.
청의 지배권을 완전히 박탈하는 것이였다.
위기를 느낀 유구국은 청나라 이홍장을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청은 이 당시 아편전쟁,태평천국운동등 나라 사정이 어려워 외면한다.
1879년 3월 일본은 군사를 동원하여 오키나와를 점령하고 왕을 폐위하고 일본 영토로 편입한다.
미국 18대 대통령 율리시스 S 그랜트는 태평양에서 일본이 커질 것을 우려한다.
류큐 3분안을 청나라 이홍장에게 제시한다.
이홍장은 외면한다.
1943년 11월 22일 ~26일 카이로 회담이 열린다.
루즈벨트는 중국 장제스에게 오키나와를 관리해달라는 주문을 한다.
실상은 중국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하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 댓가로 오키나와를 준다는 것이였다.
장제스는 이를 거절한다.
비서가 왜 거절한지를 물어본다.
그는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리면 다음 협상이 안될 것을 우려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미 장제스는 만주와 대만을 반환받는데 거기에 오키나와까지는 부담이었던 것이였다.
더군다나 이 당시 중국은 해군력이 약했다.
중국은 당시 내부 사정으로 오키나와를 등한시 했다.
오늘날 오키나와 그 일대는 태평양 요충지로 그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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