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첫 가미카제 공격을 받고 충격을 받는다.
미 전략폭격조사단을 꾸리고 종전 후 가미카제 보고서를 완성한다.
가미카제 공격법은 해수면에 가깝게 비행하면서 레이다망을 피하고 접근해서 자폭하는 방법과 높은 고도에서 급강하하면서 충돌하는 방법이 있었다.
조종사가 사망하지 않는한 계속 군함에 꾸역꾸역 갈 수 있어서 미국의 다층 대공망도 소용이 없었다.
근접신관은 발사시 군함에서 나오는 전파로 터질 수 있으므로 조금 늦게 밧데리가 작동하도록 설계 되있었는데 가미카제 전투기들은 너무 가까워 이조차도 무용지물이었다.
레이테 해전 당시 가미카제 명중률은 20.8% 였다.
명중률이 곧 격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반 뇌격기 3.3% 보다 매우 높은 수치였다.
이 후 미국이 방어에 어느 정도 성공하면서 명중률은 11.6%까지 떨어진다.
미군은 이 가미카제 공격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계속 기록한다.
이 공격을 보고 받은 맥아더와 니미츠는 적잖은 충격을 받고 극비로 붙인다.
공개 순간의 파장이 두려운 것이였다.
어느 정도 가미카제를 막을 수 있었던 1945년 5월 무렵 언론에 공개된다.
그 전에 있던 자료들도 오픈한다.
그 때부터 언론은 가미카제 분석기사를 쏟아낸다.
1923년 창간된 아사히 그래프는 77년 동안 뉴스,르포를 위주로 전달되어 좋은 역사 자료가 되고 있다.
특공대원의 활약상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미화했다.
1945년 1월 21일 국정보고에서 고이소 구니아키 일본 총리는 전황을 낙관할 수 없다면서 더욱더 특공 정신을 강조한다.
초반의 가미카제는 전략목표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여겨졌다.
여론과 윗선의 생각으로 점점 전쟁 수행의 상징과 전략이 된다.
여성들도 제국의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아들들이 제국을 위해 싸우다 죽는 영광을 느껴야 한다고 강요받는다.
이 말도 안되는 가미카제 공격에 식민지 조선 청년들도 동원이 된다.
그들 중 안재웅(마쓰이 오장)의 전과를 찬양하는 추모시를 당시 친일에 가담한 문인들이 만든다.
이들 친일파는 미군이 조선땅에 들어오자 바로 친미로 돌아선다.
가미카제 특공대 노영우도 환군의 영웅으로 선전된다.
전쟁에 투입되는 병사들 나이도 점점 어려져서 16~20세의 비중이 육군은 65%로 증가되었고 해군은 45%로 증가된다.
서정주의 [마쓰이 오장 송가]는 유명한데 내용은 일제를 찬양하고 영국과 미국을 적으로 하는 내용이다.
강제 차출로 알려진 특공대원 탁경현은 나중에 영화 [호타루]로 만들어진다.
그는 독백에서 자신은 자신의 조국(조선)과 약혼녀를 위해 싸우러 간다고 당시의 심경을 전한다.
일본은 전시동안 많은 전투기들을 생산한다.
전투기는 많았지만 전투기 불량률은 높았고 숙련된 정비사는 점점 줄어갔다.
1944년 중반 일본 항공기중 30% 정도가 전투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추락한다.
항공기를 만들어서 태평양 전선의 각 기지에 배치를 해야한다.
조종사들 경험도 적고 전투기 질도 낮아 중간에 추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배송중에 전투도 못하고 그냥 사망한 것이다.
이렇게 죽느니 차라리 적함에 돌격해서 죽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겠다.
어찌어찌해서 기지에 와도 능력있는 기술자가 없다보니 전투기들이 그냥 방치되는 경우가 흔했다.
더군다나 항공기 부품도 균일하지 않아 도저히 수리할 수 없었다.
전투기에 실린 항공유는 휘발성이 굉장히 세다.
일단 불 붙으면 불끄기 어렵고 파편들도 여기저기 튀어 동시다발적 화재로 이어진다.
게다가 사람이 조종하는 유도미사일 격인 가미카제 공격 방식은 미군에게 위협적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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